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특정 인물, 단체, 종교, 지명, 사건 등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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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정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명확한 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 지수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같은 회사 동기들을 만나면서도 나서도 지수는 홀로 남겨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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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지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열심히 했던 순간들은 결국 뭔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아구 우리 아기 이쁘다."
어릴 때 부모님의 칭찬.
이쁘다는 그 말보다도, 그 사람들이 나에게 줬던 관심 자체가 자신의 가치였고, 자신을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승무원을 좋아하게 된 것도 결국 사람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재미있어서였다. 워홀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도 사람들을 보면서 응대할 때 즐거움을 느꼈다. 그냥 그렇게 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돌이켜보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고 지수는 생각했다.
그렇게 재미있었던 사람 응대가 어느 시점부터인가 힘들어졌다.
"Hey dealer, give me some good cards so I can win here! (야, 딜러야! 내가 이기게 카드 좀 잘 뽑아봐.)"
40대 사업가가 윙크하며 뱅커에 500만 원 칩을 밀어 넣는다. 뱅커가 나오면 '딜러 덕분'이고, 플레이어가 나오면 '딜러 탓'이다.
"Banker! Banker! Banker, let’s go!(뱅커! 뱅커! 뱅커! 가자!)"
외치며 테이블을 치는 손님들.
"Hey young lady? How about a drink together? (아가씨, 나랑 술 한잔 할래?)"
베팅하면서 스치듯 손등을 만지는 취객. 슈퍼 식스에 걸어놓고 터지면 딜러 탓, 안 터져도 딜러 탓을 하면서도, 게임이 끝나면 "뱅커 5연승 후네, 딜러가 운이 좋네. 오늘 밤 운 좀 나눠줄래?" 하며 호텔 키카드를 슬쩍 밀어준다.
매일 반복되는 광경들. 돈에 미친 사람들의 절규, 운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의 절망. 그 사이에서 기계적으로 카드를 나누고 칩을 세는 자신의 모습.
지수는 교대시간이 되면 화장실 개인칸에서 멍을 때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억눌렀던 숨이 터져 나왔다. 전자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휴게실에서 전자담배를 연달아 2개 피우며 손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게 내가 꿈꿨던 사람들과의 만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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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야 지수야, 뭐 해!"
강주리가 지수의 등을 탁 치며 소리쳤다.
지수가 공상에서 깨어났다.
'맞다, 나 동기들이랑 같이 있었지.'
12월 말.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태원 카페에서 러키에잇 친구들과 만났다.
창밖에는 남산서울타워와 서울 밤 풍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리야, 여전하네. 목소리 들리니까 안심된다."
지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리에게 말을 건넸다.
"안심은 무슨, 나도 개고생이야. 어제 한 새끼가 룰렛에서 5천만 원 날리고는 나한테 '네 얼굴이 재수 없어서 돈 잃었다'라고 하더라고. 진짜 죽이고 싶었어."
주리는 여전히 거침없는 말투지만, 어딘가 안정된 느낌이 든다.
"어떻게 참았어?"
원경이가 덧붙여서 이야기했다.
"참기는 개뿔, 실장한테 바로 보고했지. 그 새끼 출입금지 먹였어."
주리는 여전히 털털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보다 훨씬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 각자 요즘 어떻게 살아? 나는 진짜 정신없어."
"나도 비슷해. 그런데 유안이 너 요즘 표정이 좀..."
"뭔가 밝아졌달까? 예전보다 윤기 좀 나는 것 같은데?"
유안이가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아 너희들 눈썰미..."
"야! 뭔 일 있지?"
"그게... 사실은..."
유안이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헐, 진짜? 언제 프러포즈받았어?"
"지난달에! 근데 너희들한테 말 안 했지? 바빠서 연락도 못 했는데..."
"야 이 년아, 이런 큰일을 혼자 끙끙 앓고 있었어?"
주리가 소리쳤다. 유안이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유안이 결혼해! 축하해! 언제야?"
원경이가 들뜬 목소리로 유안이를 초롱초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년 가을에. 나중에 청첩장도 돌릴게! 다들 꼭 와야 해!"
유안이의 얼굴이 행복으로 빛났다.
확실한 미래가 있어 보였다.
"원경이는 이제 여행 다녀온다며! 다음 주라고 했나?"
"벌써 사흘 뒤야! 이제 집 돌아가서 짐 챙기고 가족들 모시러 가야지."
"너 진짜 해외여행하고 싶어 했잖아. 잘 다녀와. 어머니가 해외여행 처음이어서 너무 좋아하신다고 하셨다며."
그러고 보니까 원경이도 가고 싶었던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지.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연수원이 끝난 뒤에도 그 열정이 그대로 유지되는 게 신경 쓰였다. 취업하고 나서 이대로 벌면서 살아간다고 했는데, 지수는 뭔가 다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지수는 뭔가 말없이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딘가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강주리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당당했다. 유안이는 결혼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경이는 여전히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반복되는 도박판 손님들이 생각났다. 가끔씩 이상한 요청들이 들어오는 도박 현장, 판돈을 모두 잃고 욕하는 사람들. 하루하루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는 쳇바퀴.
팔은 아파지고 관절은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체감되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지수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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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다음 날, 주말에 집에서 늘어져 있었던 지수.
카톡 하나가 왔다.
"언니, 집에 잘 들어갔나요?"
원경이었다.
"언니, 어제 표정이 안 좋아 보였어요. 무슨 일 있었나요?"
지수는 미안했다.
연말에 좋은 분위기에, 좋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막상 자신은 제자리걸음인 것 같고, 동기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메시지를 치다, 지수는 잠시 고개를 푹 숙이다가 메시지를 수정해서 보냈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맏언니인데, 언니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안하면서도 원경이한테는 솔직하게 감정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던 지수였다.
"언니, 괜찮을 거예요. 언니는 멋진 사람이니까요."
갑자기 돌아온 회신에 지수는 당황했다.
"뭐가?"
"언니는 잘 기억하고, 그걸 위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수용이 정말 빨라요. 뭔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한 번 상대방 입장에서도 고민해 보고, 그냥 넘겨짚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들어주고, 시도해 보고 답을 주려고 하잖아요."
"..."
"연수원 때 아직도 기억나요. 저도 언니도 칩 스태킹 기술을 처음 배웠는데, 언니는 빨리 적응해서 저한테 침착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셨잖아요. 너무 고마웠어요.“
“…….”
“한편으로는 너무 신중하게 접근하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가 배운 것을 전달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게 보여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원경이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나? 왜 하필 그 말들이 자꾸 생각날까. 원경이가 '언니는 행복할 거예요'라고 할 때 그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상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언니는 잘할 거예요. 분명."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원경이 말이 마음에 콕콕 박혔다.
지수는 메시지를 지웠다 하면서, 원경이와 보냈던 시간들을 돌이켰다.
"고마워."
그리고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세상은 넓고,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고 싶다며.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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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평범한 낮이었다.
지수는 이른 오후타임 출근을 해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바카라 테이블에서 단골 아저씨가 또 같은 패턴으로 베팅하고, 기계적으로 카드를 나누고 있었다. 담배 냄새와 시끄러운 소음,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섞여 있는 익숙한 공간.
휴게시간 15분.
평소처럼 핸드폰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했다.
며칠 전부터 원경이 생각이 자꾸 났다.
원경이가 베트남으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언니는 멋진 사람이니까요."
왜 그 말이 이렇게 기억에 남는 걸까.
오후 3시.
퇴근시간에 마침 환복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였다.
띠링,
러키에잇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주리: 야 너희들 뉴스 봤어?
주리: 베트남에서 한국 오는 비행기 추락했다네
예감이 불길했다.
지수: 어떤 비행기?
주리: VN항공 XXX 편
주리: 승무원 두 명 빼고 전원 사망이래
손이 떨려서 핸드폰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지수: 원경이가 오늘 돌아오는 날이잖아. 원경이 연락 안 돼?
유안: 나도 지금 전화해 봤는데 안 받아. 설마...
단톡방이 조용해졌다.
지수는 퇴근길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