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무덤만 남은 조문국과 특이한 오층석탑 이야기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여자 중학교 앞에는 거대한 5층 석탑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이름은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통일신라 전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삼층석탑과는 달리 전탑 양식과 목탑 건축 양식이 같이 반영되어서 상당히 독특하다.
금성면 중심에서 좀 더 북쪽으로 가면 원형봉토분으로 만든 무덤들이 있는데, 2020년 근래에 문화재청에서 사적 제555호로 지정한 의성 금성면 고분군이다.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에 걸쳐서 무려 324기나 있는데, 경주 대릉원에 있는 거대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소해서 조성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물도 신라 수도 경주와 유사하지만, 당시 의성 지방 세력의 독특한 문화요소도 보인다.
석탑도 있고, 고분도 무더기로 있는 것 보니까 신라 시절에는 명성이 상당했던 장소인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의성군 금성면으로 출발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의성군 금성면으로 오려면, 어느 지역에서 출발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수도권, 충청권과 강원권에서 출발한다면 당진영덕고속도로 북의성 나들목을 이용해 5번 국도 대구방향을 따라 내려오자. 그다음 원당 나들목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쭉 내려오면 탑리리 오층석탑에 도착할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영천 이남 지역은 신녕 나들목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대구광역시와 전라도권에서 온다면 군위 나들목에서 5번 국도와 919번 지방도를 따라 우보면으로 간 다음 28번 국도 북쪽 방향으로 합류하면 된다.
탑리리도 군위 화본마을과 마찬가지로 중앙선 철도가 직접 지나가는 역이다. 신선 개통 후 기차가 역에 정차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본역과 다르게 역 뒤로 선로가 그대로 지나간다. 그런데 탑리역을 보니 석탑 모양도 아니고, 우리나라 전통 성곽의 방어시설도 아닌 서양식 탑으로 만든 느낌이다. 인근 금성산 일대에 옛 성곽이 남아있다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통 성곽에서 정사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전통 방어시설 치(雉)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늘의 주인공인 탑리리 오층석탑은 역의 남쪽에 있다. 금성버스정류장에서 좌회전을 하면 탑리여자중학교 건물이 보이는데, 얕은 담장 너머 앞에 오층탑이 우뚝 서 있다. 오층탑 좌우와 앞에 작은 소나무들이 보이는데, 마치 탑을 지키는 호위무사 같은 느낌이 든다.
탑을 보니 불국사와 다른 곳에서 봤던 삼층석탑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기단부가 삼층석탑에 비해 높이가 상당히 짧고, 그 위에 거대한 지붕돌로 이뤄졌다. 1층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이다. 이전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사방으로 뚫린 감실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는 남쪽 방향으로만 뚫려 있다.
감실 외에 탑리리 오층석탑의 백미는 탑을 지탱하는 1층 모서리 기둥이다. 윗변이 좁고 아랫변이 넓은 민흘림기둥의 형태고 2층부터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석탑이 하늘 위로 용솟음하는 느낌이 강하다. 감실의 문지방과 민흘림기둥은 주로 목조건축에 많이 쓰였기에, 학자들은 탑리리 오층석탑을 벽돌로 만든 전탑의 축조방법을 따르면서 목조 건축 양식이 반영된 석탑이라고 말한다. 즉 초기 목탑의 형태에서 석탑의 형태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의 형태라고 해야 할까나.
그리고 석탑의 이름이 ○○사도, ○○사지도 아니고, ‘탑리리’ 오층석탑이다. 보통 석탑이 있다면 주변에 절터가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 이 주변에서 절과 관련된 유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절터에 대해 추정할 수 없는 기록도 전혀 없어서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 아직 연구대상이다.
금성면 대리리 고분군
탑리역 5층 석탑을 뒤로하고 금성면 북쪽으로 가면 왼쪽 편에 수많은 고분들로 이뤄진 사적지가 보인다. 고분 중앙에는 회색으로 된 작은 돔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이곳에 중요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회색 돔에 가까이 가보니 ‘조문국고분전시관’이라고 적혀 있다.
조문국이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 벌휴이사금 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
[벌휴이사금 2년(185)]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임명하여 조문국을 공격하였다. 군주라는 이름이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
* 군주: 신라 최고 지방행정단위인 주(州)의 장관직
조문국은 신라 초기에 정벌된 진한의 구성국이었다. 185년 경이라면 소규모 목관묘와 목곽묘가 대다수인데, 이곳에는 5~6세기에 걸쳐 조성된 고총들도 많다. 박물관에 전시된 A-1주곽에는 2명이 함께 묻혀 있는데, 노비 혹은 부하 심지어는 가족 일원을 장례식에서 함께 매장한 순장의 흔적이다. 잔인한 풍습이지만, 당대 지역 유지들의 권력이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신라가 당대 지역 유지들의 지배권을 인정한 채 간접적으로 지배하다가 통제를 강화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의성 지역유지의 권력은 왜 어마어마했을까? 오늘날 영남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문경새재지만, 당시에는 고구려와 국경을 이루었기 때문에 교역상들이 다니기에는 위험했던 곳이었다. 반면 의성은 상대적으로 후방인 데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전후로 죽령을 거쳐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신라 중앙 조정에서 특별히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문국고분전시관 오른쪽에는 다른 고분과 달리 비석 그 좌우로 문관들이 무덤을 지키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비석에 ‘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적혀 있다. 참고로 여기에 묻힌 경덕왕은 불국사를 지은 통일신라 왕과는 동명이인이다. 조문국 경덕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허목이 쓴 기언 별집 제1권에 이런 시가 있다.
천년의 세월 저편 소문국이여 / 千載召文國
망한 옛터 슬프고 처량하여라 / 亡墟足悲凉
번화했던 그 모습은 오간 데 없고 / 繁華不復睹
거친 풀밭 들꽃만 향기롭구나 / 荒草野花香
옛 무덤들 총총하게 늘어섰는데 / 壘壘見古墳
벌거벗어 백양은 보이지 않네 / 濯濯無白楊
언덕에서 밭을 갈고 있던 농부는 / 田父耕隴上
아직도 경덕왕을 말하는구나 / 猶說景德王
그토록 오랜 세월 흐를 동안에 / 天地一何悠
천지간의 흥망이 몇 번이었나 / 終古幾興亡
만물 이치 본래가 무상하건만 / 物理本無常
인정이 속절없이 슬퍼하누나 / 人情徒自傷
전고의 일에 대한 감회 못 이겨 / 感起前古恨
홀로 서서 오랫동안 개탄하노라 / 獨立慨嘆長
아무래도 경덕왕은 조선시대 의성 민중들에게 중요한 전설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어느 농부가 작은 언덕에 참외밭을 일구는 중, 무덤과 그 안의 금관을 발견하는데, 오히려 손이 금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밤 의성 현령의 꿈에 경덕왕이 나타나 무덤을 살펴보고 개수하고 봉안하라고 했는데, 실제 가보니 무덤 굴이 있고 사람이 금관에 붙어있었다고. 이후 현령이 사실임을 믿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무덤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조문국박물관이 나온다. 1960년부터 오늘날까지 발굴하고 있는 조문국의 연구 성과를 알려면 반드시 찾아가자.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랫부분이 여러 사각형으로 뚫린 굽다리 모양의 의성양식토기와 금동관이다. 특히 금동관은 고구려 양식이 혼합된 모습을 띄는데, 고구려, 신라와 의성지역 간의 교류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라고 한다. 조문국박물관은 어린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장소인데, 박물관 옆에 의성상상놀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7월 중순 ~ 8월 말 한여름에는 상상놀이터 앞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으니 참고하자.
통일신라 이전 의성군 금성면 일대는 상당히 막강한 지방권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하루였다. 하지만 경덕왕을 언급했던 조선시대의 허목은 무덤만 남은 조문국에 대해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했다. 게다가 오늘날은 의성이 지방 소멸 1순위 지역이어서 허목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몰락했다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조문국과 신라 시대 막강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개통 이후에는 청량리-부전으로 오가는 KTX-이음의 주요 경유지가 되기에 의성에 한 줄기 빛이 올 수 있을까? 쉽지 않지만 인구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길 기대해보며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