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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만난 것들: 매일 같은 길, 다른 풍경

나는 멀리 가지 않기로 했다. #5

by 운채



호숫가 근처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매일 다른 풍경을 만난다. 봄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여름에는 초록이 짙어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든다.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눈꽃이 피고, 차가운 바람이 분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탄이와 걷는다. 아니, 요즘은 탄이를 위한 산책인지, 나를 위한 산책인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일 것이다.


예의 바른 '탄'이

탄이는 다른 강아지를 만나는 걸 좋아한다.

멀리서 강아지가 보이면 귀를 쫑긋 세운다. 가까워지면 꼬리를 흔든다. 하지만, 절대 먼저 달려들지 않는다. 그냥 얌잖히 앉아서 기다린다. 상대 강아지가 다가올 때까지.


"어머, 너무 예의 바른 강아지다!"

"보통 강아지들은 막 달려드는데, 탄이는 참 착하네요.."


다른 강아지 주인들이 감탄한다.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탄이가 잘해서 내가 칭찬받는 기분. 부모 마음이 다 이런 건가...


사실, 탄이가 조심스러운 데는 이유가 있다. 포메라니안은 슬개골이 약한 견종이다. 너무 많이 뛰거나 격하게 놀면 다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탄이를 조심히 지켜본다. 조금 걷다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안아준다.


"탄이 힘들어? 엄마가 안아줄게"


3Kg 남짓한 무게 가벼운 듯 하지만, 한참을 안고 걸으면 팔이 저린다. 그래도 괜찮다. 탄이가 내 품에서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면..



호수공원의 사람들

호수공원은 늘 붐빈다.


러너들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전동 킥보드를 타는 사람들. 자전거길은 그들의 영역이다.


인도에는 걷는 사람들이 있다.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 빠르게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유모차를 밀고 가는 부모,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모두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자전거길과 인도가 분리되어 있지만, 가끔 섞이기도 한다. 러너가 인도로 들어오고, 보행자가 자전거길을 걷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잘 흘러간다. 서로를 피하고, 양보하고, 미소 짓는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탄이와 걷는다. 탄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나는 하늘을 본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다.



탄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

산책길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강아지 귀여워요!"

"만져봐도 돼요?"

"이름이 뭐예요?"


탄이는 사람들의 미소를 이끌어 낸다. 지나가던 사람도 멈춰 서서 탄이를 쳐다본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어른들은 "어머" 하며 다가온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아니, 즐겁다.


"탄이요? 5살이에요"

"포메라니안이에요. 털이 많아서 여름에 힘들어해요. 그래서 곰돌이 스타일로 이발했어요"

"네, 예의 바른 편이에요. 슬개골이 안 좋아서 조심스럽게 키우고 있어요."


짧은 대화, 하지만 그 대화 속에서 무언가가 쌓인다. 관계라고 부르기엔 가볍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는 무겁다. 어떤 날은 같은 사람을 또 만난다.


"어! 탄이다! 안녕?"


탄이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 나를 '탄이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렇게 나는 이 동네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간다.



한강라면과 커피 한 잔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호수 공원 편의점이다.

탄이와 한 바퀴 돌고 나면, 나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문 앞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호수가 보이는 자리.


"한강라면 하나 주세요"


라면기기에 봉지를 뜯고 수프를 넣는다. 가끔 계란도 하나 추가한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오고 이어서 벌겋게 달궈진 인덕션에서 물이 움직이며 끓기 시작한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여기에 커피 한잔까지. 이게 내 산책의 보상이다.


탄이는 내 발밑에 앉아 있다. 나를 바라보다 내가 주는 간식으로 잠시 행복해한다. 나는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호수를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단풍잎이 떨어진다. 러너들이 지나가고, 자전거가 달린다. 아이들이 웃고, 연인들이 속삭인다.


이 모든 것이 내 일상이다.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특별한.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매일 다른 풍경을 만나는...


산책이 주는 것

산책은 탄이 때문에 시작했다.

강아지를 키우면 산책을 해야 한다. 의무였다.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 날씨가 좋든 나쁘든, 기분이 좋든 나쁘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도 산책이 필요해졌다. 산책을 안 하면 하루가 답답하다. 몸이 찌뿌둥하다. 머리가 무겁다. 산책은 이제 나의 루틴이 됐다. 탄이와 함께 걷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며 걷기도 한다. 음악을 듣거나, 그냥 새소리를 듣거나.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리한다. 오늘 하루를, 내일 할 일을, 최근의 고민을. 걷다 보면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잊혀지기도 한다.

산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진 기분이다. 몸도, 마음도.


매일 같은 길, 매일 다른 풍경

호숫가 산책길. 나는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같은 나무들, 같은 벤치, 같은 편의점. 하지만 매일 다르다.

어제는 없던 단풍잎이 오늘은 쌓여있다. 지난주에는 초록이었던 나무가 오늘은 노랗다. 어제 비가 와서 젖었던 길이 오늘은 마르고 깨끗하다.


사람도 다르다. 어제 만났던 할아버지는 오늘 안 보인다.

대신, 새로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이 보인다. 탄이는 그 강아지를 보며 꼬리를 흔든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세상은 계속 변한다. 그 변화를 느끼는 것. 그게 산책의 묘미다.


나는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다. 새로운 곳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그냥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탄이와 함께.


그 길 위에서 계절을 느낀다. 사람들을 만난다. 생각을 정리한다. 라면을 먹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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