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이곳에는 오랜만에 하얀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게다가 기온은 며칠째 영하를 밑돌고 그늘진 곳은 여전히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운 곳이 많다. 하얀 눈 세상에 아이들은 눈싸움, 눈사람, 썰매에 정신없지만 동심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40대 여성인 나는 하얀 눈이 그저 애물단지요, 운전하는데 제일 큰 방해꾼일 뿐이다. 그렇게 하얗게 내린 눈을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니 갑자기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났다.
영화 러브레터. 특히 겨울에 보면 메말랐던 감성도 촉촉이 젖어드는 영화. 나에겐 인생영화라고 할 만큼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다. 오랜만에 인터넷으로 러브레터를 검색하니 12월에 다시 재개봉을 했단다.
벌써 재개봉만 무려 8번째라는데.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만의 인생영화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학교 3학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짧게 느껴졌던 여름방학이 아쉬웠지만 방학 내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털어내느라 아이들은 열심히도 떠들어댔다.
"똑. 똑. 똑."
아이들의 방학과제를 검사하시던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셨다. 교실 밖에는 누군가 손님이 찾아왔고 담임선생님께서는 잠깐 몇 마디의 말씀을 나누시는가 하더니 교실 안으로 작은 손님과 함께 들어오셨다.
"자, 3학년 3반 조용! 오늘부터 여러분하고 함께 할 새로운 친구가 전학 왔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50명이 넘는 우리 반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선생님 옆에 서있는 남학생에게로 향했다.
키는 크지 않고 아담한 사이즈.
특별히 내 기준에서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아이였지만 왠지 야무지고 다부진 모습이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서. 연. 우.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지낼 테니까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하렴."
서연우?
내 이름하고 같은 아이. 갑자기 우리 반에 나랑 이름이 똑같은 학생이 생겼다.
그것도 여학생도 아닌 남학생.
왜 하필 그 많은 이름 중에 내 이름이랑 같은 건지. 세상에 이런 우연도 없다. 내 이름이 그렇게 흔한가?
10살 꼬맹이였던 나로서는 반가움보단 부끄러움, 당혹감 그 자체였다.
그 남자아이는 다행히 내 옆자리는 아니고 내가 있는 근처 빈자리에 앉게 되었다.
"서연우가 우리 반에 2명 있는데 앞으로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시는 듯하더니
"그래, 이름이 똑같으니 다른 것은 바꿀 수 없고 성만 바꾸자. 성만."
성을 바꾼다고? 어떻게 구별하신다는 걸까?
"앞으로 선생님은 여자 서연우는 여연우, 남자 서연우는 남연우라고 부를 거야. 다들 알겠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부르도록 하렴."
그럼 내 이름은 이제부터 여연우라는 것인가? 우리 부모가 물려주신 성을 이렇게 한순간에 바꾼다고?
동명이인인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된 이후로는 내 이름을 제대로 들어본 일이 없었다. 선생님이 '서연우!'라고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에는 그 친구와 난 동시에 대답을 하곤 했으니까. 선생님도 때때로 우리의 성대신 '남'과 '여'를 넣어서 불러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으셨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재밌다고 웃어댔다.
하지만 즐거움은 그들의 몫이었고 부끄러움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 이름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 시절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우리들을 엄청 존중하고 의견을 잘 들어주시는 사랑이 넘치는 여자 선생님이셨다. (초등학교 6학년 내내 가장 기억에 남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뽑으라면 단연 초3 담임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 선생님은 햇살 좋은 봄날에는 시를 지어서 낭독도 해주시고 천둥 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불을 끄고 무서운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리고 종종 여유 시간이 있을 때면 남학생, 여학생 인기투표를 하셨다. 반장, 부반장 투표도 아닌 이 투표는 우리 반 아이들을 은근히 긴장시키고 설레게 했다. 그때 나는 꽤나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증명할 길이 없으니 자신만만하게 적어본다. ) 키는 작았지만 선생님이 보시기에 항상 모범생이었고 친구들과도 두루 잘 지내서 인기투표는 늘 자신 있었다.
그날은 첫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는데 공부를 하기 싫었던 우리들은 선생님께 남학생, 여학생 인기투표를 하자고 제안했다. 인기투표는 후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학생, 여학생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내면 되는 것이었다. 사실 난 우리 반에서 좋아하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고 작은 종이쪽지에 남학생은 그 친구의 이름을, 여학생 이름은 내 이름을 썼다. 종이쪽지가 걷어지고 드디어 발표시간이 되었다. 작게 접힌 종이가 하나씩 펴지는 순간 이름이 불려지고 칠판에는 正 자가 그려져 갔다. 역시 그날도 여학생의 최고 득점자는 내가 되었고 남학생은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칠판에는 남학생 이름 중에 남연우도 적혀 있었다. 그 아이도 인기가 좀 있었던 것일까. 마냥 조용히 자신의 일만 하는 아이였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 친구의 이름을 좀 써줬어야 하나. 갑자기 이름이 같은 사람으로서 괜히 미안해졌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아이로부터 듣게 된 사실인데 그 남연우가 여학생 이름에 내 이름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와우! 이건 또 무슨 일이람. 그 아이가 날 좋아한다고? 나에게 어떤 신호를 주거나 사건도 없었는데 말이다. 오호라. 그럼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을 그만 좋아해야 하나. 아무튼 이름이 같아서 기분 나빴던 것도 잠시 그 친구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친구와의 어떤 친한 계기도 만들지 못한 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1월이 지나고 2월이 되어 우린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개학 날, 1교시가 시작되었는데 그 친구의 자리가 비어있다. 어? 왜 안 오지? 아픈가? 4학년 때 같은 반이 된다면 꼭 친해져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고 학교에 왔는데 정작 그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서연우 학생은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습니다."라고 하셨다.
왜 간다는 인사말도 없이 그냥 간다는 말인가? 우리 반에 올 때도 갑자기 오더니 갈 때도 갑자기 떠나는구나. 이제 겨우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내 마음을 전할 기회도 없이 가다니 깊은 아쉬움이 남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친구의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으로 그 친구도 따라간 것이었다. 아무튼 나와 동명이인의 그 친구와의 일은 크나큰 사건 없이 6개월 간의 만남으로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 영화 러브레터처럼 가슴 절절한이야기가 나와야 하지만 나에겐 그런 일은 없었다.나를 위해 남겨진 종이쪽지, 책 한 권도 없다.)
30년도 훨씬 넘은 지금,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겨울이 되면 가끔씩 생각난다.
특히 러브레터 영화를 볼 때마다.
살면서 내 이름이 무척이나 싫었지만 러브레터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 이름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랄까? 어쨌든 개명을 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었는데 혹시나 만날 일이 있을까, 나를 알아챌까 싶어 이름을 바꾸면 안 되겠다 싶었다. 가슴 아픈 첫사랑도 아닌데 상상이 너무 과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