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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Mar 17. 2020

이혼 금지곡

수능 금지곡 아니죠, 이혼 금지곡입니다.

친정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을 조금 넘겼을 때,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동아리에서 재미있는 이벤트 소식을 알려왔다. 다 같이 어떤 곡 하나를 선정, 합창 연습을 해서 실제로 공연 중인 극 무대에 깜짝 출연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내내 집에만 있으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던 나는 정신을 좀 차리고 뭔가 활동적인 일로 기분 전환할 생각으로 오랜만에 모임에 나갔다. 스무 명이 넘는 동호회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난 내게 인사를 해왔고 나 역시 그들의 인사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지휘자가 말했다.


"합창곡은 <걱정 말아요 그대> 예요."


우리 팀에서 선정한 곡은 "걱정 말아요 그대"였고, 나는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사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ic27EnDDls


합창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두가 잘 아는 곡이었고, 그만큼 진도는 나가기 쉬웠다.

단 한 명. 나만 빼고.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날아 들어와 박혔다. 노래는 막을 새도 없이  내 상처뿐인 마음을 찾아내고, 어루만지고, 부드럽게 토닥이며 간질여서 나는 간신히 눌러뒀던 슬픔이 자꾸만 번져나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파트를 나눠서 연습이 진행되는 사이 내 머리는 점점 더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다 같이 불러볼게요! 둘, 셋!"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노래 '걱정 말아요 그대'중에서


웃는 얼굴로 첫 소절을 부를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둘째 줄에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까지 만을 간신히 부르고는,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부를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주워 들고나가면서 함께 모임에 온 언니에게 "언니,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하고 도망치듯 연습실을 빠져나와야 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누가 보진 않았을까 연신 백미러를 흘끔거린다. 이윽고 액셀을 밟고 차가 출발하자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 노래를 다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폰에서 음악을 재생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마치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진 어린아이가 아픔을 꾹 참고 일어섰을 때, 누군가 다가와 "괜찮니?"하고 물어보면 그제야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난 이 노래가 건네주는 위로에 마음을 들키고는 어린애처럼 마음 놓고 엉엉 울어버렸다. 억지로 일어서려던 마음은 노래 하나에 버튼이 눌린 듯 무너져 내렸고 집으로 가는 한 시간 내내 나는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으며 우느라 모든 기운을 다 써버렸다. 덕분에 그날 나는 며칠치 일지 모를 억눌린 울음을 모두 해소하고 참 오랜만에 편안하게 단잠을 이룰 수 있었지만, 역으로 그 때문에 내게 이 노래는 함부로 들으면 안 될 일종의 금지곡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음악을 전공했지만, 음악이 사람에게 어떤 위로와 감동을 주는지 직접적으로 크게 와 닿는 경험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데 이 날, 본의 아니게 이혼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삼 그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노래 한 곡이 가져다주는 따듯한 위로가 이렇게나 크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게 놀랍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라. '걱정 말아요 그대'를 틀어놓고 차 안에서 대성통곡하며 달리는 여자라니. (이 노래는 여전히 내 눈물 버튼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나는 한동안 악기 연습을 거의 하지 않고 쉬고 있었는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엄청나게 연주가 하고 싶어 지는 것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통해 내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나 한다. 나는 악기를 꺼내어 혼자 집에서 몇십 분을 열심히 연주했다. 내 감정에 푹 빠져 마치 거장이라도 된 것처럼, 쉴 새도 없이 오랜만에 열과 성을 다해 연주를 했더니 체력이 안돼 힘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한바탕 쏟아내서인지 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친한 선배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언니는 박장대소하며 정말 웃기지만 자기도 그 기분 뭔지 알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이혼을 경험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우울함에 빠져 감정이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된다는 점이었다. 그다지 큰 걱정 없이 살았고 소심할지언정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 성격인 내가 우울에 잠식당해 휘둘려보니 이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고, 때때로 툭툭 불거져 나오는 저항할 수 없는 우울감에 잠도 못 자고 울고만 있다 보면 이러다 또 내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어찌어찌 견뎌냈지만 혹시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하고 싶다. 마치 우리가 독감에 걸렸을 때 죽을 고생을 하고 이주를 걸려 낫느냐, 아니면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삼일 만에 가볍게 낫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지만 상담을 받자니 금전적 부담도 크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가 알게 되면 걱정이 크실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참았다. 이 모든 것들이 독이 될 줄 모르고. 그렇게 혼자 끙끙 앓던 우울이 점점 커져서 뻥 터져버리기 일보직전일 때쯤 아이러니하게도 잊고 있었던 음악이 단단히 잠긴 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차오른 감정을 해소시켜 주었다. 물론 전부 다 해소하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자꾸만 깊어져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늪과도 같던 우울감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렇게 내게 음악은 아주 훌륭한 심리상담사이자 치료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친한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고백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지금이야 이전보다는 조금 가볍게, 필요한 상황에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 친구에게 말할 때만 해도 거의 처음 용기를 내서 제일 친한 친구들 두 세명에게만 풀어냈을 시기였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면서, 너는 이혼 안 할 줄 알았는데...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어. 씁쓸하게 웃으면서 또다시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집어삼켰지만 그때의 나에겐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런 나를 보던 친구는 연이어, 내 주변에 반은 이혼한 것 같아 진짜. 나 이러다 결혼 못할 것 같은데? 들은 게 너무 많아서.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나오던 눈물이 멈춰버렸고 나도 그녀의 웃음에 뭐? 하곤 같이 웃어버렸다. 너무나 별거 아닌 것처럼 천진하게 말해오는 반응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는 주변에 이혼한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했고 그녀의 이야기 속 이혼 동지(?)들은 이전과는 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오히려 그녀들이 전보다 신나게 잘 살고 있다고 마무리하며 "그래도 네가 이혼할 줄은 몰랐다 진짜. 아니 잠깐! 내 축의금 돌려줘!" 하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이미 받은 거 어쩔 거야 배 째! 하면서 당당히 철판을 깔았다.  눈물로 시작한 고백은 그렇게 유쾌하게 마무리 지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친구가 연이어 말하던 '너는 이혼 안 할 줄 알았다'라는 말에  한편으론 착잡하고, 한편으론 묘한 기분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김윤아의 'Going Home'이 흘러나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gR4_uoJdOr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 해 본다

-김윤아 'Going Home' 중에서


한강에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차들이 제 각각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 나간다.

그래. 이제 정말 좋은 일이 생기겠지.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그럴 수 있길.

나는 노랫말을 따라 되뇌이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마음이 다시 젖어오지만 이번엔 울지 않고 강하게 액셀을 밟는다. 문득, 그날 무슨 일이냐고 묻던 언니가 떠올라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지난번에 먼저 가서 미안해. 그때 왜 그랬냐면..."


최대한 담담하게 그날 일을 말한다. 또다시 눈치 없이 울음이 나오는 것을 웃음으로 막는다. 언니가 아아, 그랬구나 하고 웃으며 그런 것 같았어. 잘했어.라고 말해주었다.  

안심이 된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 나아간다.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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