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이 안겨주는 평온
괜찮아진 줄 알았지만 우울함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터져 나왔다. 한 번은 엄마 아빠와 함께 윤식당을 보고 있었는데 저물어 가는 노을을 다 같이 보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윤여정님이 나는 노을이 그렇게 싫더라. 라며 바라보던 모습이 왜 그리 슬프던지. 저물어가는 해가 제 빛으로 물들여놓은 바다는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놀고 있는 연인들, 가족들, 아이들이 있었다. 너무나 편안해 보여서,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다신 내가 가질 수 없는 행복일 것 같아서, 아마도 그래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참을 수가 없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며 숨죽여 울었지만 결국 소리가 났다. 엄마 아빠가 들으실 텐데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데, 티비 볼륨이 점점 높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마음 놓고 울으라는 듯이.
17. 5.14 am 2:58
슬픈 일만 가득한 하루였다.
긴 하루에 지쳐서 침대에 누우니 더 긴 한숨이 나왔다.
오늘 밤에는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줘. 꿈에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어.
생활 속에서는 여기저기 마음을 건드리는 지뢰가 많았다. 아이들과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결혼해서 귀여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촌이 올리는 가족사진들, 누군가의 결혼식, 결혼생활을 물어오는 친구들, 어느 연예인의 이혼 이야기 등... 괜찮은 줄 알았던 감정과 슬픔은 나 여기 있어하고 상기시키듯이 나도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그럴 때면 나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 번 우울감에 잠식당하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다 그만두고 떠나고 싶어 졌다. 생에 처음 느껴보는 저항 할 수 없는 우울감과 좌절감, 무력감, 실패감.
‘난 이제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쁜 생활에 치여 잠시 그것들을 잊었던 착각일 뿐, 난 아직 괜찮지 않았다.
몇 년 전 , 대학원 동기 언니와 만난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난 늘 그렇듯이 "오빠는 잘 지내? "하며 신랑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언니는 약간 곤란한 얼굴이 되더니, 사실은 이걸 말하려고 했어 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무거운 입을 최대한 가볍게 떼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나 이혼했어. "
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지만,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말이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고 이내 속상해졌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언니를 좋아했기에 그만큼 언니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나도 그랬듯, 누구나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언니는 여러 가지 갈등 끝에 괴로워하다가 이혼을 선택했고 이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언니는 돌아오지 않고 거기에 눌러앉아 여행 가이드란 새로운 직업을 선택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며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제 그만 들어오란 잔소리를 했었다.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언니가 왜 외국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지, 이젠 안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무너져 내린 다음에야 내가 아직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이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란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에(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지만 그때는 정말 떠나는 게 절실했다.) 여행을 알아봤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그래, 그러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난 급하게 일본행 티켓을 끊었다. 일 때문에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나에겐 단 하루라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필요했다. 어디든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오자. 그리고 거기 가서, 다 묻어버리고 오자.
그렇게 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날 모르고,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곳.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웃을 수도 울 수도 있는 곳.
하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난 여전히 우울한 상태였다. 가족 단위 여행객만 보면 눈물이 났고, 공원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다가도 눈물이 나서 서둘러 선글라스를 집어 써야 했다. 그래도 몇 시간씩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우울감도 차츰 잦아들었다. 좋아하는 라멘집에서 라멘을 먹고 잡화점을 구경했다. 작은 소품이나 디자인 용품을 좋아해서 몇 시간씩 구경하다, 아주 마음에 드는 소품 하나를 발견하곤 값을 치렀다. 일본 잡화점들은 재밌는 것들이 많아서 구경하다 보면 서너시간은 훌쩍 간다. 마법처럼. (그리고 지갑도 빈다. 거짓말처럼. )
밤이 되어 야경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강물에 다 던져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우울함도, 너도, 우리도 다 여기 던져버리자. 너와 만났던 시간, 꿈꿨던 것들, 말할 수 없던 아픔과 벗어날 수 없었던 우울함도 여기 다 묻어버리고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정말 감정을 다 내다버리고 올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침착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시 용기 내서 내일을 살아보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좋아질 일만 남은 게 아닌가.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 인해 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발짝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느리지만,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여전히 아프지만 이제는 나아가고 싶다.
그래, 나는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