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 윤 Feb 20. 2020

치유의 방법 1

몰두할 게 있다는 것.

전부터 글 쓰는 걸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나는 결혼 후 몇 달 뒤, 큰 마음을 먹고 극작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나름 지원서도 받고 합격을 해야 다닐 수 있는 곳이었는데 수업료가 굉장히 비싸서 거의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 수준에 가까웠다. 아카데미에 붙고도 높은 수강료에 고민하던 나는 결국 취소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는데 때마침 거기서 전화가 왔다.


“죄송하지만 과목 하나가 폐강되었어요. 그래서...”


“아 그래요? 그럼 저는 그....”


“그래서 수강료가 50만 원 인하되었습니다. “


“아 네. ...카드 되나요?”


아, 하마터면 그만둔다고 말할 뻔했다. 나는 그 길로 무이자 할부의 힘을 빌려 수업을 등록했다. 3개월 간 카드값을 값아야 할 미래의 나에게 짐을 떠넘기며.




근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여전히 내 결혼생활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고 결국 아카데미를 등록하고 얼마 뒤 난 친정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어딜 나가고 싶지도 않았는데 아차, 그때 끊어둔 아카데미의 개강이 다가온 것이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17. 4.22 am 3:31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지내면 좋겠다.

17. 4.22.  am 4:46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고 가슴은 자꾸 무너져 내린다.
때때로 미어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다 그만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으론 무엇도 못할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취소하기엔 돌려받지 못할 몇 퍼센트의 수강료가 아깝고 안 나가자니 궁금하긴 했다.

몇 년을 하고 싶었던 일이어 선지 그 와중에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야 마는 타입이다. (그렇게 대학원 갔다가 피를 봤던 과거의 일은 잊고....) (인간의 욕심을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ㄷ....)

아무튼 결국 나는 꾸역꾸역 준비를 하고 아카데미에 나갔다. 지하철에서 이동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생각이 가득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자기소개하라는 건 아닐까. 내 상태를 뭐라고 해야 하지. 막상 도착해보니 각자 기본적인 소개만 하고 딱히 뭘 묻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약간 자신감이 생긴 나는 내 나름대로는 웃기도 하고 말도 잘하면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후에 아카데미 동기가 하는 말이 이랬다.


“처음에 언니 만났을 때 첫인상이 엄청 무서웠어요. 표정이 뭔가 되게 굳어 있어서.... 그런데 나중에 완전 오해였다는 걸 깨달았죠!”


그 말을 들으며 놀랍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 나름대로 애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쩔 수 없이 티가 많이 난 모양이다. 하긴, 안 나면 이상한 거지. 아카데미의 첫 개강일은 내가 친정집으로 돌아온 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극작 수업은 재밌었지만, 한편으론 너무 어려웠다. 극작의 역사와 기본 이론을 배우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건 즐거웠지만 매번 나오는 창작 과제를 해야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고 과제를 하기 위해 나는 늘 밤을 새워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모자랐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노트북을 싸들고 집 근처 카페로 가는 게 일과였다. 오늘 하루 학교 수업을 어떻게 진행했는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우울감이 심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막상 눈 앞에 닥친 과제를 해야 하니 또 그거에 급급해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게 되었다. 어떻게든 써가면 코멘트를 해주시는 멘토 선생님들의 말씀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매주 수업이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앞에서 친정집으로 돌아온 뒤 몇 달의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그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게 아카데미 수업을 들은 것이다.

아카데미에는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편했던 것도 같다.

한 번은 수업 중에 뮤지컬에서 작가와 작곡가는 마치 부부관계와 같다며 선생님이 “결혼하신 분 안 계시죠? “ 하고 물으셔서, 난 그저 가만히 있었고 다른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는데 선생님이 뮤지컬 작가와 작곡가의 관계를 결혼-이혼-위자료 등으로 설명해주시면서 아, 이거 결혼한 사람이면 딱 아는데! 하셔서 속으로 쓴웃음 짓던 것이 기억난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 다 알아들었어요. 사실은 결혼했(었지만 그만둘 거였)거든요.





뭔가 몰두해야 할 게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잊게 해 준다.

일을 하고 돌아와서 시간에 쫓기면서 글을 쓰고, 제대로 나오지 않는 글에 괴로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운다는 게 재밌어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처음에 집에 와서는 내 인생이 이렇게 되다니! 싶은 생각에 매일 밤 울다가 잠들었는데, 아카데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과제가 늘어가고, 마감이 생겨나면서는 글을 쓰느라 울 시간도, 망쳐버린 것 같은 내 인생에 우울해할 시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런다고 우울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많은 시간을 그 생각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레 시간은 흘러갔고 정신없이 해나가던 과제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나와, 조금씩 과거를 덮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엄마 나 이제 진짜 괜찮아.


그런 것 같아. 아카데미 시작 후 두 달쯤 지났을 때였나. 난 엄마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다고.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고.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 02화 삼년상을 치르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