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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그의 점수는요

남순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아들이었다. 남순은 완벽했던 아들에 대해 회상할 때 '내 새끼지만 똥 하나도 버릴 것 없다'는 병철이 한 말을 자주 인용했다. 의견 충돌이 잦아 바람 잘 날 없었던 병철과 남순이었지만 외아들에 대해서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견일치를 가졌던 셈이었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함함하다’ 하니 부모의 입장만 듣고는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손수 밥을 지어 색시 입에 떠 넣어줄 만큼 다정한 남편이었다’는 혜순의 진술까지 보태지니 더 이상 의심을 품을 수는 없었다. 선욱이 자식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로서 '꽝'이라는 점은 나로서는 유감인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여느 때와 다르게 옷을 차려입은 병철과 남순은 나에게도 말끔한 옷을 입혔다. 어디를 간다는 말도 없이 콜택시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내린 곳은 천주교 공동묘지였다. 그때까지 한 번도 우리는 선욱이나 선욱의 죽음에 대해서 터놓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날은 작정한 듯 ‘인사'를 하라며 선욱의 산소 앞에 나를 세웠다. 그리고 남순은 본인이 직접 썼다는 묘비문을 소리 내 읽었다. 살아생전 선욱이 효자가 되겠다고 맹세한 내용과 부모보다 일찍 떠나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썩 훌륭하고 꽤 절절한 문장이었으나 내 귀에는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묘비에 적혀있는 날짜가 몹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7월 9일. 7월 9일이라는 날짜를 확인하고 다시 연도를 확인했다. 웃을 상황은 아닌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선욱의 사망일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12일 전이었다. 이거 무슨 드라마야? 아님 영화야?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게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선욱의 죽음에 대해 어른들이 아무리 쉬쉬한다고 해도 선욱이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 정도는 눈치껏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와 내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본 적 없었다. 그것도 2주보다 짧은 12일이라는 시간 차이로.


병철과 남순의 일가친척들이 집에 오면 반드시 거치는 레퍼토리가 있는데 그건 어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지 아비 쏙 뺐다.”


마치 나에게는 귀가 없다는 듯 혼잣말인 것처럼 읊조리는 그 목소리는 결코 혼잣말일 수 없을 정도로 컸고, 그곳에 있는 모두를 슬프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슬픔보다는 불편한 쪽에 가까웠는데 만난 적 없는 내 아버지의 시간을 나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대개의 경우 병철과 남순 혹은 다른 친척들)만 공유하는 느낌이 들어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비극'이 나로 인해 상기된다는 것이 싫었다. 


탄성처럼 터뜨리는 친척 어른들의 ‘아이고, 지 아비 쏙 뺐다'의 호들갑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은 남순이 항상 가지고 다녔던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욱의 사진을 보고 난 후였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져 오히려 낯설었다. 눈썹, 눈매, 입매, 얼굴형까지 어린 내 눈에도 이건 호들갑 떨만하네, 싶었다.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딸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 정확히 12일 전에 죽는 바람에 기어코 딸을 '후레자식'으로 만든 선욱이 야속했다. 12일만 (죽음을) 참았다면(?) 적어도 듣기 거북한 '꼬리표'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뭐가 그렇게 급하셨나요. 나는 그 12일이 너무 억울했다. 사실 나에게 그런 꼬리표를 달게 했다는 사실보다 한 번도 나를 보지 못하고 떠나버렸다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이 더 컸다. 만났다 해도 눈도 못 떴을 신생아가 무슨 기억이 있겠냐마는 최소한 생부에게 한 번 안겨 보긴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가져다주는 자존감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날과 나의 첫 날이 며칠만이라도 겹쳤다면 짧았지만 '양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있는 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까. 그래서 좀 더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까. 선욱의 사진을 처음 본 이후로 나는 종종 상상하곤 했다. 부모와 아내에게 쏟았다던 그 다정함으로 갓 태어난 딸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감격스럽게 안아보는 선욱의 모습을. 그리고 그는 분명 자신의 얼굴을 쏙 빼닮은 딸을 애정과 행복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을 거였다. ‘똥도 버릴 게 없는 착한 아들', ‘밥을 떠 먹여주는 다정한 남편’, 선욱은 백 점짜리 아들과 남편이었으나 아버지로서는 미안하지만 ‘예선 탈락'이상의 점수를 줄 수 없다. 역시 사람은 모두에게 완벽할 수 없구나. 그래서 그의 평균점수는 얼마쯤이 합리적일까 계산해 보며 나는 선욱을 건조하게 상상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 슬픔보다 야속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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