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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소녀가 되지 못한 아이

나에게는 좀 특이한 이력이 있다.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나 무려 '호주'가 되어본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5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가부장제의 중심대 역할을 했던 호주제는 2001년 병철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 2005년 호주제 규정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순간까지 나를 호주로 만들었다. 그때 나는 중3이었다.  ‘아들→손자→미혼인 딸→미혼인 손녀→배우자→어머니→며느리’라는 참으로 어이없는 호주 승계 순위 덕분이었다. 선욱은 병철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므로 살아있었다면 호주가 되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고, 나는 선욱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나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병철에는 손자가 없는 셈이었다. 물론 미혼인 딸도 없었기에 그다음 차례인 '미혼인 손녀'에 해당하는 나에게까지 순번이 돌아오게 된 것이다.


병철이 떠나고 나서 남순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우리 가족의 호주이며 소년소녀가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난 아직 미성년자고 나 말고도 어른이 둘이나 더 있는데 멀쩡한 어른 둘을 놔두고 왜 내가 소녀가장이 되어야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법 덕분에 세상에 대한 반감과 반항심이 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 말도 싫었다. 소녀가장이라니. 작을소, 여자 여, 집 가, 우두머리 장, 그러니까 주민등록증도 발부되지 않은 중학생 여자가 한 가정의 우두머리라는 건데 고작 15살 아이에게 지나치게 큰 부담을 주는 말이었다. 부모나 친척이 없는 아이에게도 무턱대고 '주인'의 완장을 채울 것이 아니라 가족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가정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책임 아닌가. 하물며 나는 내 피의 무려 50의 지분이 있는 혜순도, 25퍼센트의 지분이 있는 남순도 있는데 어째서?!


병철이 떠나고 나서, 아니 사실은 병철이 있을 때에도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은 혜순이었다. 외아들을 잃고 중풍으로 두 번이나 쓰러진 병철은 항우울제만 먹지 않았을 뿐(이미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약을 한 움큼씩 복용 중이라 더 먹기도 힘들었겠지만)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유치원 등하원를 시킨 것 빼고는 외출을 전혀 하지 않았고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 몇몇을 빼면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내가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 있게 되자 병철의 외출은 더욱 줄었다. 병철이 하루 종일 앉아있던 1인용 물소가죽 소파는 같은 날 샀던 똑같은 종류의 3인용 소파에 비해 한 뼘은 더 내려앉았다. 선혈처럼 붉었던 가죽은 병철이 흘린 땀으로 굳은 피 같은 색이 됐다. 호전되는가 싶던 중풍이 재발하자, 남순은 병철을 돌보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운전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던 혜순은 누가 봐도 가장 가장다웠지만 이상한 대한민국 법은 며느리에게 호주를 맡기는 대신 같은 성 씨의 중학생 여자 아이를 호주로 임명(?)했다. 여자에게 권리를 주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호주제를 고수한 사회는 어린 가장들을 만들었고,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은 동정의 시선을 생산했다. 불우하지 않아도 될 아이들을 불우하게 만들었고 불쌍하지 않아도 될 아이들을 불쌍하게 만들었다. 국가의 뜻에 따른 병역 의무에 가산점을 주듯 나라의 이상한 법에 의해 원치 않은 호주가 된 소녀가장에게도 가산점을 줘야 마땅하지 않나. 


호주로서 한 가정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했다거나 남순의 말대로 돈을 많이 버는 의사가 되지도 못했지만 말과 무의식은 무서운 힘을 가진 게 확실했다. 소녀가장이라는 프레임은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었고 그것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나는 내 몸무게보다 몇 배 더 무거운 중력을 느꼈다. 가산점도 ‘주인’도 싫었다. 나는 그저 가벼운 '소녀'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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