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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2등급 손녀


어느 날 남순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나에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달라고 했다. 글씨 연습을 하겠다는 이유였다. 남순이 일하러 외출하지 않은 날이면 내 책상 옆에 밥상을 펴놓고 나에게서 받은 공책에 무언가를 썼다. 굳이 내 책상 옆에 밥상을 펴고 앉은 것은 손녀의 학업 증진을 위한 동기부여를 하고(=손녀가 딴짓을 하는지 감시하고) 더불어 본인의 글씨 연습도 하겠다는 일석이조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남순의 공책을 보면 큰 발전이 없어 보였고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동지로서 일종의 책임의식을 느낀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글씨 연습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남순의 공책 가장 윗줄에 <읽기>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들을 쓰고 남순이 따라 쓸 칸에 가이드선을 그어 주었다. <쓰기>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우'자는 마름모 모양으로, ‘어'자에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금방 그만 둘 줄 알았던 글씨 연습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내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귀가하는 시각이 늦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평생 다정한 말 한 번 건넨 적 없는 병철을 ‘그래도 남편’이라며 하늘처럼 여겼는데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은 병철의 훤칠한 키와 인물 그리고 달필이었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는 옛말도 있지만 남순은 병철의 훌륭한 인물과 글씨를 자랑스러워했다. (남순의 경제력을 보면, 분명한 건 얼굴이 밥 먹여 주진 않지만 적어도 밥을 벌어올 힘을 주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병철의 글씨도 혜순의 그것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그런 혜순의 피를 부분 물려받은 나도 썩 나쁘지 않아서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바른 글씨 쓰기 대회에서 곧 잘 입상을 해왔다. 


남순은 자신이 가족 중 달필이 아닌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창피해했다. 달필이 문제가 아니라 남순은 한글을 잘 쓰지 못했다. 30년대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남순은 아버지가 무려 한약방을 했던 동네의 지성인이자 유지였으나 딸이었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국민학교가 최종 학력이었던 남순의 한은 배움에 대한 열정(혹은 집착)으로 이어졌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여러 개의 평생대학을 문어발식으로 다님으로써 ‘못 배운 한'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했다. 짧은 가방끈에 대한 콤플렉스와 외동아들을 잃은 한을, 아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인 손녀의 출세로 보상받으려는 욕망을 가졌던 남순은 나에게 항상 ‘더'를 강요했다. 2등을 하면 다음에는 1등을 하라고, 1등을 하면 다음엔 전교에서 1등을 하라고 했다. 한 번도 ‘잘했다'는 칭찬을 듣지 못한 나는 그 어떤 성취에도 기뻐할 수 없었고 더 잘하지 못한 스스로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남순에게 나는 언제나 부족한 존재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의 손녀가 되어본 적 없는 나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혹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따위의 문장 앞에는 ‘전교 1등을 하는 아이라면'이라는 전제조건이 생략 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 입에 들어가는 밥숟가락이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남순의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은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최소한 그런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매일 1등을 할 수는 없어도 우등생의 기본인 일기 쓰기를 빠뜨리지 않았고, 중학생 때 병철의 임종을 위해 모인 친척들 앞에서 굳이 방문 학습지를 펴고 수학 문제를 푸는 쇼(show)를 선보였다.


공부와 성적에 집착했던 남순은 손녀가 언제나 ‘상대적 1등'이 되길 바랐고 천재가 아니었던 나는 그 기대와 집착에 부응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까지는 그래도 공부를 곧 잘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배치고사에서 얻은 성적으로 학급 1등으로 입학을 했고 덕분에 실장이라는 완장도 찼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손녀를 의대에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동안 매년 두둑한 돈봉투를 담임교사들의 안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갖은 애를 썼으나 대학진로는 학부모의 ‘정성'이 아니라 학생의 실력과 운에 달린 것이었다. 수능을 망치고 재수는 더 망치는 바람에 의대는커녕 지방국립대 일반 이공계 학과에 들어가게 되어 남순에게 큰 실망을 안기고 말았다. 대학교에서 학생회 임원 활동을 하고 장학금을 받고, 국내 최대 규모의 대기업에 인턴을 하는 동안에도 남순에게 나는 ‘의대에 가지 못한 손녀'일뿐이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그가 원망스럽긴 했으나 손녀가 평생 먹고살 걱정 없이 남 부럽지 않게 잘 살길 바라는 그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그리고 남순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감인 것은 그의 사랑의 방식이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다. 칭찬과 인정에 흠뻑 노출되지 못한 아이는 자라서 1등보다 멋있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애초에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재능이나 끈기를 갖지 못한 사람이 완벽을 좇으면 남는 것은 자괴감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게으른'이라는 부분도 ‘완벽주의자'라는 부분도 어느 것 하나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노력을 통해 욕심을 채울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해내지 못하니 마음이 불편한 날들이 쌓이고 삶은 고달파졌다. 어쩌면 심각한 불안증세와 수면 장애 그리고 낮은 자존감 등을 불행했던 가정환경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불운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양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높은 책상 의자에 앉아 낮은 밥상에 웅크린 채 공책에 내가 써준 문장들을 따라 쓰는 남순을 내려다보면 자그마한 그의 몸이 더 작게 보였다. 한 줄에 10칸이 그려져 있던 공책 속 빈칸들이 남순의 꼬불거리는 글씨들로 채워졌다. 처음보다 점점 글씨의 형태를 갖춰나가는 변화를 지켜보며 남순의 인생을 생각했다. 친모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모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남순이 원망스럽다가도, 사랑을 받으며 커야 할 나이에 눈치를 먼저 배웠을 게 분명한 그의 어린 날을 상상하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런 환경은 남순이 시집을 오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남편의 사랑도 박했기 때문이다. 욕심 많고 고집이 셌던 남순을 병철이 사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던 것인지, 병철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서 남순이 욕심 많고 고집이 세진 것인지 모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사람은 나 이전에 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 연습 공책이 어느 정도 채워질 때마다 남순은 수시로 나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그렇게 형편없는 건 아니지 않냐고. 그러면서 혼잣말을 하듯 덧붙였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쓰면 당신도 꽤 잘 쓸 수 있는데 누가 보고 있으면 그렇게 손이 떨린다고 했다. 물었던 말을 반복해서 묻는 남순에게 나는 그 정도면 훌륭하다고, 학교 선생님들도 판서하는 걸 보면 모두 다 글씨를 잘 쓰는 건 아니더라며 그 정도면 이미 충분히 멋진 글씨라고. 그건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몰랐다. 너 정도면 훌륭한 아이라고. 이미 썩 괜찮은 손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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