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Oct 26. 2024

'도'를 아십니까?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6화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내가 평생 살면서 아마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을 꼽으라면 단연코, ‘외롭지 않아요?’다. 그 질문을 가장 처음 들었을 때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국민학교로 입학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을 굳이 밝히고 싶다)도 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자주 어울렸던 동갑내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 장녀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는 자신이 화목한 가정을 가졌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가족사진 앨범을 보여주겠다며 자기 몸보다 큰 앨범을 들고 와서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짚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였고, 누구의 생일이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무엇을 했다 등등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지만 무거운 앨범을 들고 온 정성이 있고 하니 초반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을 좀 해줬다. 하지만 미취학 아동의 인내심이란 그리 대단할 순 없어서 어린이날 놀이동산에서 찍은 사진에 다 달았을 때 나는 코딱지나 파고 싶은 욕구를 겨우 누르고 있었고, 끄덕이던 고개의 각도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내 반응이 신통치 않음을 깨달은 그 아이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앨범을 옆으로 치우며 내게 물었다. ‘니는 안 외롭나?’ 나는 순간 반쯤 감겨 있던 눈을 제대로 뜨며 그 아이를 쳐다봤다. ‘내가 니라면 엄청 외로울 것 같다'. 나는 좀 민망했고, 기분이 나빴으며, 짜증이 났다. 일단 우리 나이(만 5세 전후)에 외로움을 논하는 건 영 민망한 일이지 않는가. 그리고 가족사진 앨범을 보여준 이유가 자신의 화목함을 내게 전시함으로써 내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고 그로 인한 우월감을 기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그 아이는 내가 조모 친 슬하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 부친이 아주 오래전 돌아가셨다는 것, 그래서 형제도 자매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딱히 외롭다는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았다. 어린이로서 하루 일과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녹록지 않아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낄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외로움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고), 외로움, 슬픔, 그리움 따위의 신파적인 단어들을 좀 오글거리는 것으로 여겼다. ‘외롭지 않으냐, 내가 너라면 엄청 외로울 것 같다’는 그 아이의 숨은 본심은 ‘네 처지에는 외로워야 해. 넌 불쌍한 아이이고 가족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해.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을 말이지.’인 게 틀림없었다. 짜증이 확 났다. 내가 외로운 지 안 외로운 지를 왜 네가 결정하는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서른이 넘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어린이 었던 만 5세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부정 의사를 표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때때로 외로움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 아이의 질문도 더 깊게 고민해 봤다. 고민하면 할수록 그 질문의 의도는 외로움보다는 부러움을 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너는 외롭지 않니?’는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많은 타인(가족)에 둘러싸여 있는 내가 부럽지 않니?’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따지면 뭐 영 부럽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90년 대 한국은 지금보다도 더 정상가족에 진심이었던 데다가 인권감수성은 제로에 가까웠던 시절이었기에 사회가 정해놓은 보기 좋은 가족의 카테고리에 입성한 사람들은 정신적인 피로감이 훨씬 적어 보였다. 


어렸을 때는 형제자매가 없다는 이유로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리고 연애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 더욱)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강남역 사거리에서부터 신논현역 사거리 일대에서 받은 ‘도를 아십니까?’ 질문만큼 지겹도록 물어온다. 나는 여전히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인류가 이름 붙인 모든 종류의 감정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외로움의 정의가 타인과의 연결이나 사회적 유대의 부재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예전에 있었던 연결이 없어졌거나 과거에 느꼈던 유대감이 지금은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테스 형(소크라테스)도 “인간은 자기가 아는 만큼 느낀다"라고 하셨다. 형제자매가 없어서, 배우자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려면 일단 있어본 상태를 경험했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낄 전제조건에서 예선 탈락인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 내게 외롭지 않냐고 물으면 질문자에게 외로움의 정의는 무엇이냐고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되묻는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의지할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냐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럴 때 내가 질문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이렇다. 의지할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일반적인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게는 없는 것이 기본세팅 값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고 의지했던 특정한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옆에 없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아쉽고 그리운 마음은 든다. 그건 누군가가 없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로움이 아니라 그리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외로운 감정이 없어야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일정한 중력이 작용하고 우리는 그 일정한 힘을 항상 견디고 이겨내며 (있는 줄도 모른 채) 당연히 살아간다. 나에겐 외로움이 그런 존재다. 물론 ‘식사는 하셨어요?’ 따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무게감으로 물어오는 그런 질문에 이렇게 각(?) 잡고 대답을 하진 않는다. 가벼운 일일연속극을 굳이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결혼을 한다고 해서, 동거를 한다고 해서, 연애를 한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까. 오히려 ‘의지하는 사람’ 아니, 사실은 ‘의지할 수 있다고 내가 믿기로 한 사람’이 생기는 순간부터 얼핏 외로움처럼 보이는 서운함과 실망과 자괴감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말하는 ‘외로움처럼 보이는’ 감정들은 삶의 형태에 따라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굳이 나의 어설픈 논리로 핏대 세우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 알베르 카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다"라고 한 장 폴 사르트르,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결국 고독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한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훌륭한 철학자들이 옛날부터 ‘인간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고독하고 외롭다'는 진리를 얘기해 왔다. 외로움의 본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강남역 사거리와 신논현역 사거리를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도’를 아느냐는 질문에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라고 대답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06화 다녀오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