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5화
캐나다 사회는 다를 줄 알았다. 확실히 다르다. 개인정보를 묻는 경우도 거의 없고, 결혼여부에 대해 언급하지도 주제 삼지도 않는다. 30대 비혼 여성으로서 살기에 이 얼마나 심적으로 평온을 주는 사회인가. 나는 이런 캐나다를 사랑한다. 하지만 삼십 N 년의 인생 중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았던 한국인이기에 때때로 한국 사람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타국살이를 하다 보면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떠올리거나 모르는 단어를 빙빙 둘러 설명해야 하는 에너지를 전혀 쓰지 않아도 되는 모국어로 하는 대화가 그 내용이 비록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헛소리일지라도 너무너무 소중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대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한 땀 한 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대화와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공감이 절실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평소에는 피하고 싶었던 한국인을 스스로 찾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사실 굳이 찾지 않아도 내가 사는 도시엔 한국인이 이태원의 외국인만큼이나 많다. 잠시 한 눈을 팔다가 실수로 누군가와 옷깃을 스치거나 부딪힐 뻔했을 때 ‘I am sorry’ 대신 ‘앗, 죄송합니다’로 반응해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다. 원래 다니던 정규직 직장을 그만두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들고 들어 간 곳이 식당 주인도 직원도 모두 한국 사람이었고 공부가 그리워 다시 학교에 갔더니 한국어로 수업을 해도 될 정도로 한국인이 많았다.
한국사람과 한국어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한인 커뮤니티 안에 있다 보면 결국 불편한 포인트가 생겨 말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게 됐다. ‘혼자' 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나이에 결혼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삼십 대 중반의 문턱을 사뿐히 넘고 나니 ‘싱글 사회’ 안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결혼 경험이 있고 (이혼을 했고) 현재도 연애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다. 결혼 경험은 없어도 연애 중인 사람이 그다음이며, 연인은 없지만 한 번이라도 갔다 와본(?) 결혼 경력자들이 다음 칸을 차지한다. 사실 2, 3등은 개인적 상황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인 것 같지만 논란조차 없을 확고부동의 최하위단은 연애도 못하고 있는 주제에 이혼 경력조차 없는 싱글이다. 너무 주관적이라며 비난할 텐가?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최하위가 최하위가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받은 느낌으로 그려본 싱글의 계층구조는 그런 모습이다. 계층구조를 확고히 다진 사람들의 생각을 굳이 상상해 보면 이렇다. 어떤 연유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긴 했으나 일단은 결혼 제도에 헌신함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따르려 노력했고, 또 다른 연애를 통해 사회가 원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으니 최상등급을 부여받아 마땅하다. 아직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 길로 가는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2등급이 아깝지 않다. 문제는 4등급이다. 이혼이 흠이라고 여겨 숨겨야 했던 시절엔 3,4등급이 각축을 벌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좀 변했다. 2004년 SBS 프로그램 '짝'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돌싱'이란 표현은 이혼의 부정적인 인식을 희석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돌아온 싱글. 새로운 시작과 또 다른 출발의 가능성 담고 있는 이 얼마나 희망적인 단어인가. 예전에는 흠으로 터부시 했던 이혼이 박수와 응원을 받는 사회적 분위기로 변해가는 반면 ‘그냥 싱글’은 여전히 동정과 안타까움의 대상이다.
온라인 메신저 오픈채팅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만든 캐나다 내 한인 커뮤니티가 많다. ‘3040 캠핑모임', ‘80년 대 생 등산모임' 따위에 나가보면 참석자 대부분이 솔로다. 당연히 돌싱도 꽤 많다. 스스로를 돌싱이라고 소개하는 그들의 당당한 패기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뻔했다. 역시 뭐든 가진 자(경험 부자라면 더더욱)는 여유가 있는 법이구나. 이쯤 되니 정말 어디라도 갔다(?) 와서 계급상승을 노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계급상승이 욕심난다기보다 마음의 평화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결혼 경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어른 대접을 받는다. 설사 그 경력이 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들 이미 ‘큰 일'을 한 번 치러 봤으니 어련히 제 앞가림을 알아서 잘하지 않겠냐는 모종의 신뢰도 느껴진다. 반면 ‘무경험자’에게는 수많은 물음표와 의심과 조언들이 예의 없이 쏟아진다. 초면인 사람들에게서는 무슨 대단한 하자가 있어서 그 나이가 되도록? 하는 탐색의 눈초리를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의 결혼 상대자와, 연애 상대자들을 떠올려 봤을 때 ‘하자'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지…… 초면에 친분이 좀 쌓이면 예외 없이 더 늦기 전에 제발 눈 좀 낮추라는 조언을 받기 시작한다. 아아, 여러분들의 관심과 조언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 관심과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 믿습니다, 암요. 하지만 그걸 전단지 아르바이트생이 광고지 뿌리 듯 이토록 무지성으로 날리시니 타인의 시선과 판단을 내려놓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이렇게 책까지 쓰겠다며 이 난리 부르스를 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요.
이혼 경력자들에게 도전정신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질투를 하는 것도 아니다(음, 그들이 보여줬던 패기와 오감으로 전해지던 여유를 두고 보면 좀 부러운 것도 사실인가). 그들을 밟고 올라서 싱글 피라미드에서 경쟁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양한 삶이 당연한 세상이 되는 걸 소망하는 입장에서 탈혼에 성공한 당당한 그들의 이야기가 응원받는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현상이다. 다만, 경험이 없다고 해서 애송이 취급을 받는 ‘모태 싱글'은 좀 억울해서 변론을 개시하는 바다. 한국 옛 속담의 지혜를 빌려보자면,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 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비혼주의자들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감히 ‘우리'로 연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된장'으로 여길 수 있는 스스로의 커트라인이 높다는 걸 알고 애초에 상대적으로 낮은 확률에 배팅하지 않을 뿐이라고 대변하고 싶다. 여기서 된장과 똥은 단순히 결혼상대자인 배우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결혼제도에 헌신함으로써 따라오는 책임과 의무, 동반생활에 진입함으로써 겪는 생활의 변화 전반을 의미한다. 주식 공부에 한창 빠져있던 때 알게 된 주식 전문가가 이런 말을 했다. 주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고 본인도 그 방법을 추구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오르락내리락하는 등락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사람이라면 주식으로 돈 버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다고. 돈 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신 건강, 육체 건강이라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가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 해도 그 과정에서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일단 재고해 볼 일이다. 미래 일은 장담할 수 없다고 쳐도, 일단 혼자 살 것을 결심한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스트레스에 취약한지에 대한 전반적인 메타인지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을 확률이 크다. 나는 결혼을 유지하는 사람도, 이혼을 결심한 사람도 너무너무 대단하고 위대해 보인다. 하지만 로또를 사는 사람들의 희망이 허황되다며 손가락질할 수 없듯이 당첨 확률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아예 로또를 사지 않겠다는 결심 또한 존중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