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4화
스물 하나, 재수를 한 후 대학생이 된 첫 여름 방학 나는 내 인생 최초의 홀로 여행을 감행했다. 그것도 간도 크게 혼자 유럽 배낭 여행을.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 대구에서 났던 나는 혼자서는 서울도 한 번 가본 적 없는 아이였다. 바야흐로 때는 2007년,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다. 21일짜리 여행을 준비하는데 걸린 기간은 100일이 넘었다. 그때 당시 포털 사이트의 유명한 배낭 여행 카페에서 찾은 정보를 매일 엑셀파일에 정리하며 루트를 짜고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 시간 단위 일정을 계획했다. 대략 이런 식이었다.
<런던 첫 번째 숙소 찾아가기>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해 시계탑(사진 자료 있음)을 등지고 오른 쪽으로 200걸음 → 사거리가 나오면 거기서 좌측으로 꺾어 3블럭 직진 → 파란색 대문(사진 자료 있음)이 있는 집이 나옴 → 파란색 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골목길로 진입 후 (성인 여성 기준) 300걸음 정도 가면 빨간 벽돌집(사진 자료 있음) 나옴 → 빨간 벽돌집 다음 집이 ㅇㅇ 민박 (전화번호 : +xx-xxx-xxxx)
이런 식으로 21일 동안의 여행일정을 엑셀에 정리해 출력하니 100페이지가 넘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2부 씩 인쇄했더니 책 한 권 분량이었다. 한 부는 배낭에, 한 부는 4등분으로 접어 힙색에. 여행 내내 혼자여야 했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그 종이뭉치를 지켜야 했다. 지금이야 데이터를 맘 편히 쓸 수 있는 선불 유심 칩과 스마트폰만 있으면 구글맵이 친절하고 신속하게 안내해 주지만 십 수 년 전만 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럽 배낭 여행의 첫 도시였던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영국 사람으로 추정되는) 외국사람(그 곳에서는 자국민이겠으나)이 가득한 공항철도를 올라탄 후 이국적인 창 밖 풍경을 보면서도 현실감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만큼 긴장과 안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21일이었다. 다행히 큰 사건사고 없이 첫 배낭여행을 혼자서 그럭저럭 해낸 후 나는 틈만 나면 배낭을 꾸렸다. 가끔 여행 동지를 찾기도 하고,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짧은 일정을 함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였고 여행사를 끼지 않고 혼자 계획한 자유여행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함께하는 상황을 유독 힘들어 한다는 것을 깨닫기 전이었으나 대부분의 여행이 혼자였던 이유는 단순히 자신감과 이기심이었다. 혼자서도 낯선곳에서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타인이라는 변수에 잠재하고 있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 하지만 자신감과 이기심으로 시작한 혼자 떠난 여행은 내게 혼자만의 경험과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낯선 곳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들 속에 오롯이 나를 밀어넣으면서 내가 어떤 환경에 취약하고 어떤 상황에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지 그리고 결국 어떤식으로 해결해 내는 사람인지 알게 됐다.
기대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원망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약한 기차표가 하루 전 취소됐다는 소식을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로 한 당일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 여행 메이트가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탓했을 지 모른다. 기차표를 예약한 사람이 그 사람이라면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확인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기차표를 예약한 사람이 나라면 예약은 내가 했으니 기차표 확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냐는 마음 때문에 원망했을 것이다. 원망하는 마음과 더불어 또 다른 백해무익한 감정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한 대응을 상대방이 해주길 바라는 기대다. 그 상황이 만약 여행 중이라면 ‘백 가지의 해'는 ‘백 한 가지'로 늘어나는데 그건 바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다 더욱 지연된 대응으로 낭비되는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여행 특성 상 한정적인 시간에 주어진 것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혼자 여행을 할 때 원망할 대상도 여유도 없었던 나는 당시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얼른 벗어나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이성의 온 힘을 쏟아 그 상황에서 신속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게으른 내 성격 상 혼자가 아니었다면 부정적인 상황은 어쨌거나 나를 이기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 서로를 힘들게 했을게 분명했다.
원망하는 상황이 자주 생긴다는 것 외에도 나에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 피곤한 점은 또 있다. 성격 테스트, MBTI, 에니어그램 결과의 공통점이,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하고 신경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나의 그것들 이상으로 이입하고 느낀다. 지금쯤 배가 고플까? 식사 때가 되었으니 밥을 먹자고 해야 겠지? 무릎이 안 좋다고 했는데 너무 많이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수시로 여행의 만끽을 방해한다. 그래도 분위기(?)가 좋을 땐 부담없이 물을 수 있으니 쿨하게 묻고 쿨하게 해결책을 함께 찾을 수 있는데 문제는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아까 전부터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점심으로 먹은 파스타가 별로라 그런가? 내가 운동화 끈을 묶는 바람에 배차가 20분인 버스를 눈 앞에서 놓쳐서 그런가?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이 바로 10미터 전방에 있어도, 4대 째 이어오고 있다는 120년 전통의 이탈리아 로마의 유명한 젤라또를 손에 들고 있어도 상대방의 불편한 표정을 끊임없이 감식하며 그의 감정과 기분을 짐작해 내느라 그 어떤 감흥도 맛도 느낄 수 없는 타입이다. 그런 성격을 두고 민감하다, 예민하다, 소심하다, 신경질적이다, 오지랖이다…… 할 수 있겠으나 그 성격을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거나 나는 못말리도록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 모든 피곤함과 곤란함을 극복하는 데 에너지를 쓸 각오를 하느니 차라리 혼자를 택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종류의 여행이 ‘혼자가 장땡이'인 것은 아니다. 혼자하는 여행자로서 ‘짬'이 제법 찬 나는 이제 나만의 명확한 여행 기준을 가지게 됐다.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첫 째로, 여행의 목적이 휴양이거나 유흥일 경우 혼자보다는 마음맞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두번째는 공통된 특정 목적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가령, 발리 울루와뚜(Uluwatu)에 있는 리조트에 놀고 먹고 마시는 휴양이나 말레이시아 시파단(Sipadan)에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위한 여행이다. 문제는 함께 하는 여행의 아주 중요하고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기가 그 무엇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슬프지만 이건 백퍼센트 내 성격 문제인 것 같다. 핑계를 삼아보자면 전세계 인구의 1퍼센트밖에 없다는 INFJ(내향형, 직감형, 감정형, 판단형)인 성향 탓에 나에게 친구 만들기란 푸앵카레 추측(Poincaré Conjecture : 3차원 구의 유일성을 묻는 문제로, 러시아의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이 2003년에 이 문제를 해결)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이유로 아직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많이 누려보진 못했지만 아직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3차원 구의 유일성을 묻는 그 어려운 세계적인 수학 난제도 결국 해결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