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2화
캐나다에 온지 벌써 햇수로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사람들을 많이 봤다. 어디나 그러하듯 캐나다도 생각보다 더 좋은 점과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점이 있더라. 가지고 있던 것과 누리던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환경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두려움보다 기대가 더 높을 확률이 컸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생각보다 좋은 점'보다 ‘생각보다 형편없는 점'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각자가 느끼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르다. 어쩌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열 명의 이민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캐나다에서 버티는지 물어보면 열 개의 다른 대답이 나올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들 열 명에게 물어보면 또 열 개의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느리고 조용한 캐나다의 라이프 스타일이 낯선 이국땅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여유로움이 되고, 누군가에겐 한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지루함이 되는 것처럼.
워킹 홀리데이로 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녀의 교육을 위해 오는 가족단위가 많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와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 질문을 받게 된다.
“왜 캐나다에 살아요?”
그 짧은 질문 안에는 생략된 문장들이 있다. ‘가족도 없이 외로울텐데 무엇 때문에 캐나다에 살아요?’ 워낙 많이 받는 질문이라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책까지 썼지만(졸작 <무작정 퇴사, 그리고 캐나다> 깨알 홍보 맞다) 한마디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다양성의 당연함’이라고 요약한다. 캐나다 스스로 ‘Diversity is our strength’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만큼 문화적 다양성을 자부하지만 이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점이 아니라 나쁜 점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한데 모여 있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고 무례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친 시간동안 나에게도 물론 있었다(그 또한 할 말이 너무 많아 책까지 썼… 홍보 그만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의 당연함'이 단점이 아닌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게는 ‘다양성'보다 ‘당연함'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소수자 차별은 웬만한 곳에서 금지 되고 있으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알고 있는 ‘인지의 단계'를 지난 ‘자연스러운 실천의 단계'에 도달해야 가능한 성숙의 차원이다. 사실 캐나다는 워낙 다양한 이민자들이 많기 때문에 ‘다른 것이 당연'해 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모국어부터 음식, 옷차림, 태도, 하물며 체취까지 다른데 하나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를 할 수가 없다. 사회적 통념, 편견, 잣대 따위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의미가 없어져 버린 셈이다.
그런 이유로 ‘(그 나이 되도록) 혼자 사는 여자'의 타이틀은 이 곳에서 크게 흠이 되지 않는다. 아니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이었다면 나이, 결혼 혹은 연애 유무, 거주 환경 등의 호구조사가 첫 만남 초반 30분 안에 끝났을 텐데 여긴 그렇지 않다. 하루 9시간 씩 바로 옆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같이 일한지 6개월 만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너가 꺼린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혹시 나이가 어느정도 되는 지 물어봐도 될까?”
일이 지루해질 때마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농담을 그렇게 하고도 서로 나이조차 몰랐던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니 개인적인 상황(나이, 결혼 혹은 연애 유무, 거주 환경 따위)이 흠으로 작용할 일도 없다. 명절 날 ‘우리 ㅇㅇ은 몇 등 하니?’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친척들의 질문들이 쌓여 청소년들이 아파트 난관에 발을 올리게 만든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상대방이 궁금한 것이 당연하지 뭘 그렇게 과잉반응하느냐고? 개인적인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원죄를 따지자면 그 집단의 문화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미 기존하는 기준으로만 작성된 채점표를 들고 타인을 판단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채 질문을 생산한다.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비극을 만드는 것은 친근한 관심과 순수한 호기심의 탈을 쓴 유해한 질문이다. 친근하고 순수하게 남기 위해서는 무심코 던져지는 개인의 물음표가 사회적으로 폭력적인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아, 내가 너무 오바했나? 아동 및 청소년 자살률까지 들먹이며 ‘인간의 호기심이 타인을 향한 흉기가 될 수 있는가'에 따위의 논문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해외 살이의 하고 많은 장단점들 중에서 다양한 문화의 접촉에서 빚어진 타인에 대한 일종의 무관심이 안정과 평온을 준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최대한 마찰을 줄이고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자는 합의가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겠으나 실제로 살아보니 한편으로는 그게 정신건강에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부터 백까지 전부 다른데 하나부터 일일이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그것이 좋은 쪽이든 싫은 쪽이든 앞으로 아흔아홉 번이나 마음을 더 써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캐나다가 좋아? 한국이 좋아? 묻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모른다. (의료 혜택, 교육 환경, 언어 장벽 따위는 일단 차치하고) 일단 본인이 어떤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느냐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단일민족국가인 한국은 그만큼 단합이 잘 되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 ‘나와 다른 것'에 노출되어 일일이 신경씀으로 인해 피곤해져 본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캐나다가 나에게 맞을지, 한국이 나에게 맞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코로나가 창궐했던 시절의 물리적 거리두기처럼 정신적인 거리두기가 주는 자유와 평화가 본인에게 더 중요한지 친근감과 정이 주는 소속감과 유대감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보면 답을 구하기 쉬워질 거라고. 인정(認定)이냐, 인정(人情)이냐 그것이 ‘문제’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