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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6. 2024

도망 친 그곳에 낙원이 있을까?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화



우연한 계기로 아니 독기같은 계기로 인생 첫 책을 썼다. 제목은 ‘무작정 퇴사 그리고 캐나다'.  mz세대들을 공략할 만한 제목으로 썩 훌륭한 키워드 같았다. 20대 후반 꽤 괜찮았던 직장과 환경을 포기하고는 정말 말 그대로 무작정 캐나다에 와 홀로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담았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모든 것이 낯선 곳에 온 나는 갓 태어난 신생아 같았다. 아니 사실 그보다 나빴다. 타지에서 이리저리 엎어지고 깨질 때마다 주는 우유 잘 빨고 채워주는 기저기에 똥만 잘 싸도 칭찬받는 신생아로 돌아가고 싶었다.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칭찬받는 인생이라니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가끔 너무 힘든 날에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왜 갑자기 캐나다로 떠났는지 알 수 없어 흥미롭게 여기는 동시에 답답해했다. 퇴사 인사 이메일 답장으로, 회사 이메일을 더이상 열어볼 수 없어진 후에는 개인적인 문자나 전화통화로 물어왔다. 

“도대체 웬 퇴사? 갑자기 캐나다는 왜 뜬금없이?!”

그도 그럴 것이 잘 다니던 직장이 있는데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다른 나라로 가는 이유가, 현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했거나 그게 아니면 전도유망한 남자친구와 결혼해 이제는 전도유망한 남편이 된 사람을 따라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꽤나 짐작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친하게 지내는 입사동기들 중에 그런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한국의 대기업 문화에 실망을 느낀후 남몰래 해외 취업에 성공했거나 결혼 후 남편의 이직 혹은 유학을 위해 다른 나라에 가거나…… 


그 사이에서 해외 취업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다이아 반지를 끼어주며 캐나다로 가자는 남자도 없는데 무작정 퇴사와 캐나다행을 감행 한 것은 지금 돌아봐도 좀 미친 짓이 맞았다. 미래에서 온 과학자가 십 년 전으로 돌아갈 타임머신 일회용 탑승권을 내 손에 쥐어준다면 어떨까? 2014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그 미친짓을 또 저질렀을 것 같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던 그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케익으로 치면 유통기한을 넘겨 재고정리를 고민해야 하는, 결혼정보회사 여성회원의 감점 요인이 되기 직전인 그 시점 나는 각종 소개팅과 맞선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경미한 멀미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손녀를 ‘제 값에 보내기' 위해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인맥을 총동원하는 것 같았다. 수원에서 직장을 다니던 나는 주말마다 자주 대구로 소환되었는데 그때마다 무릎이며 허리, 손목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시던 할머니는 집 안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오래된 전화번호기록부를 찾으러 돌아다니시며 어딘가에 끊임없이 전화를 하셨다. 할머니의 휴대 전화기가 따뜻하게 발열되기 시작할 때 쯤 체결건은 꽤 쌓여 다음 주 주말의 내 계획은 자동 무산되었다.


결혼정보회사의 등급제도 기준에서 한 단계가 떨어지는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건 혈육 뿐이 아니었다. 회사 선배와 남자동기들은 제비가 물어 오는 박씨처럼 어디서 그렇게 물어오는 건지 신기할만큼 열성적으로 카톡 프로필을 넘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머니와 회사 선배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들 나름의 선심으로 해준 수고였다고 믿는다. 당시에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내 또래의 여자들은 다들 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고, 나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면 당연히 교복을 입어야 그 학교 학생이라는 자격을 부여받고 문제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듯 결혼이라는 옷을 입어야 그 사회의 자격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할머니가 적어주는 전화번호와 사람들이 던져 준 카톡 아이디를 성실히 받아적으며, 모르는 번호로 날아오는 문자에 담긴 식당으로 카페로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그러다 각성을 하는 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회사 동기나 선배들이 만들어준 소개팅과 맞선은 그 무게가 달랐다. 천진난만하던 나는 지금껏 해오던 숱한 소개팅과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 착각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에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고 내 쪽에서 주말 오후 적당한 시간을 정하면 그쪽에서 적당한 스파게티 집을 정해 주소를 보내주었다. 소개팅에서 처럼 스파게티 면을 포크로 돌돌말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질문에 대답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서로를 탐색하는 소개팅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각성을 하게된 계기는 소개팅이 아닌 맞선이었다. 가업을 2대 째 잇고 있던 집 안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누나가 둘이었는지 하나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어쨋든 가업을 이을 유일한 후보였다. 까르보나르와 고르곤졸라 피자를 하나씩 시켜 나눠 먹으면 어떻겠냐는 제안까지는 여느 소개팅과 다를 바 없었는데 그 이후에 날아오는 질문은 나를 점점 굳게 만들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오가는 질문은 대게, 회사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냐, 여가 시간엔 보통 어떻게 보내느냐, 종교는 혹시 있느냐,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 취향은 어떻게 되냐 따위였는데 그 남자는 그런 걸 물어보지 않았다. 학창 시절 성적이나 키, 몸무게, 건강 상태와 지병의 유무를 물었고 연애 상대가 아닌 결혼 상대 아니, 3번째로 가업을 이어줄 후손 생산에 무리가 없는 상대를 찾으러 나온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취조를 하는 강력계 형사 같았다. 내 얼굴과 외모, 분위기를 넘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적격유무를 파악해야 하는 집안의 막중한 임무 수행을 하는 그에게 설렘이나 수줍음 따위가 들어설 여유는 없어보였다. 소개팅보다 맞선 자리가 많아질 수록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고 취향보다 유전자를 궁금해하는 질문들과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탐색의 눈빛에 나는 그 좋아하던 스파게티를 예전처럼 신나게 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한 방은 그 사건이 아니었다. 모든 만남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잘 나가는 집안의 며느리로 간택될 만큼 훌륭한 유전자는 아니었을 지 모르나 적은 모수의 경험으로 대한민국의 결혼시장 전체를 싸잡아 욕하며 굴러 들어온 기회(그때 당시에는 놓치면 안되는 기회라고 믿었다)를 차 버릴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걸 그만둬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나의 조모친 때문이었다. 그날도 여지없이 대구로 소환된(약혼식이라도 올리기 전엔 온전한 내 주말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 댁에서 ‘진정한 여성의 도리'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반색이 된 할머니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할머니의 지인의 지인이자, 지난 주에 내가 만났던 맞선 상대의 어머니였다. 언사가 조심스러운 편이었고 말수가 많지 않았으며 나이 차이가 꽤 있었던 그와의 만남은 인상적이랄 게 없어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그러니까 그의 집안에서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전달받은 나의 할머니는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 소식을 전하며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고마, 가거라.”

나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가긴 도대체 어디를 가란 말인가. 경상도 사투리로 ‘고마'는 ‘그만'이라고 순화되나 그 안에는 그 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제 이것저것 그만 따지고’ 였다.


할머니 시대에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 못하진 않았다. 다만 문제는 할머니의 유일한 희망이 나였다는 데 있었다. 금지옥엽 외아들이었던 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먼저 가버리자, 그 외동아들의 외동딸이었던 나는 32년 생 이 여사님의 삶의 희망을 본의 아니게 몰빵받게 된 것이다. 공부 머리가 그렇게 좋지 못했던 나는 재수를 하고도 할머니가 학수고대한 의대진학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시집이라도 잘 간 손녀'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던 셈이었다. 효도를 하겠다는 의지로 맞선을 보러다닌 것은 아니었으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오라는 데 그냥 가라는 할머니의 부탁인지 절규인지 모를 한 마디를 듣자마자 진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이 아니라 캐나다로.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포기해야 했던 캐나다 유학에 대한 미련도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큰 물'에서 더 큰 도전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고마, 가거라'의 짧지만 강력한 한 마디 절규가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었을 뿐이었다. 난 그때 알았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나는 결국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적당히 ‘오라는 데 가고 말았을 것'이 라는 걸. 그리고 그 후 찾아왔을 할부 같은 후회와 스트레스가 나를,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주기적으로 괴롭혔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기분이었고 나는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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