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뻔한 프롤로그, 그거
질문이 생겼다. 아니 그전에 질문을 받았다. 대게의 경의 외부에서 온 질문은 큰 고민 없이 즉각 답을 한다. 무슨 음식 좋아해요?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과 매운 음식이요. 평소에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세요? 밀린 청소를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어요. 간혹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캐나다에 살면 좋은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 두 마디로 대답할 수 없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요’ 같은 성의 없는 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성의 없는 대답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손바닥에 박힌 사소한 가시가 되었고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해소되지 못한 가시처럼 불편하게 찔렀다. 그래서 긴 글을 통해 대답을 했고, 그 글은 내 인생 첫 책이 되었다. 애초에 확실한 답이 있어 ‘내 대답은 말이야……’라는 식으로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나도 답을 몰랐다. 찾고 싶었고 답을 찾는 내 방식이 글쓰기였을 뿐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사물의 정체와 본질을 파악하듯, 내게 쓴다는 것은 내밀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찾아가는 일이었다. 과거를 짚어보는, 때론 막막하고 때론 지루한 이 일이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라 믿으며 말이다.
이번에도 질문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왜 결혼 안 해요?”
사실 새삼스러운 질문은 아니었다. 10년은 족히 들어온 질문이지만 삼십 대를 깊숙히 통과하는(맙소사 내가 이런 말을 아니 글을 쓸 상황을 맞이하다니, 믿고 싶지 않다) 나이가 되자 분명 같은 질문인데 무게가 달라짐을 느꼈다. 1년이 추가될수록 어깨에 던져진 질문의 중량이 10킬로그램쯤 늘어난 느낌이었다. ‘혼자가 편해서요'하며 어깨 털 듯 툭 쳐낼 수 있었던 20대의 대답이 더 이상 내게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외부로부터 온 질문은 가볍게 반사되지 못하고 내 안으로 통과해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썼다. 언제나 그렇듯 똑 떨어지는 결론은 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원고를 끝낼 때쯤엔 내가 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영화 3분의 2 지점에서 무서운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면 영화가 더 이상 무섭지 않듯 좀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만큼 덜 불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내가 택한 삶이 어떤 형태이든 스스로 덜 불안할 수 있을 정도로만 ‘알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혹시 ‘그래서 혼자 살라는 말이에요? 말라는 말이에요?’하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이 책을 펼쳤다면 미안하지만 나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도 무수히 많은 책들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비혼', ‘혼자', 홀로', ‘1인가구' 따위의 검색어에 걸리는 콘텐츠란 콘텐츠는 모조리 들이 팠다. 마치 열흘은 굶은 사람이 빵부스러기 하나에 집착하듯 답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답은 없었고 공식도 없었다. 미리 살아 본 누군가가 만들어준 공식 속에 ‘나'라는 변수를 집어넣으면 ‘짠'하고 도출되는 확고한 공식, 의지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변하지 않을 진리를 기대했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간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 있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그래도 환불 대신 다른 용도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 가령 냄비받침대라든지).
그저 ‘혼자'라는 키워드에 검색되는 또 다른 별 문제없는 ‘삶'이 세상에 추가되길 바랐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일수록 차별과 억압이 줄어들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가 바라는 ‘정상적인 삶' 이외도 썩 괜찮은 삶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누군가의 희망에 0.1%만큼이라도 공감과 응원을 실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더불어,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들과, 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그래서 스스로를 위해 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한다는 믿음을 통해 그만큼 덜 불안해질 수 있다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