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감정 글쓰기 4주 차

by 황서영

'감정 글쓰기' 코칭 수업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글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강의/코칭/편집

황서영 no.more.thinking.and@gmail.com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은 유나는 시아버지 장례식에서조차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기보다는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었다. 혼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신세한탄을 하는 일이야 종종 있는 일이지만, 친정엄마에게도 눈물을 보이는 일은 극도로 친정엄마에게조차 불편한 일이었다. 친정 식구들과 안부를 묻는 영상 통화에서 조금이라도 눈물이 고이려 하면 애써 시선을 돌리고,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이 서둘러 전화를 끊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남은 감정을 삯이 곤 삭이곤 했다.



그런 얼음 공주 같은 유나에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오랜 기간 봉사를 해왔던 유나는 어머니 학교에서 행사 진행자로 섬겨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러 해 전에 어머니 학교에 처음 참석 했을 때, 얼마나 눈물, 콧물을 흘렸던지 그때의 뜨거웠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학교는 본인의 속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때에라야, 참가자 자신과 또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도 힐링이 되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곳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떨리기도 했지만 모임 인도자라는 새로운 경험이 어떤 만남을 가져다 줄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5명의 40-50대의 비슷한 연령대의 엄마들이 같은 테이블에 한조로 배정받았다. 유나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참가자들은 4주간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각자의 상처가 치유받기를, 그래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을 것이다. 노래와 율동에 맞춰서 가볍게 긴장을 풀며 서서히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를 나누는 첫 번째 사람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사회를 맡으신 60대 후반의 권사님은 그동안 파란만장했던 본인의 인생 스토리를 눈물 없이도 태연하게 읊어 대셨다. 그분의 시집살이 수난기를 듣는 동안, 교회 대예배당은 정적이 감돌만큼 고요했고, 참가자들의 콧물 훌쩍이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렸다. 눈물의 물고를 트신 사회자님의 순서 이후에, 각자의 테이블에서 주어진 주제를 놓고 참가자들의 이야기 나눔이 시작되었다.


부부 갈등으로 인해 그 상처로 아이가 말이 없어지고 이상 행동을 보여서, 아이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미라 씨의 이야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도 그 슬픔의 무게에 억눌려 하루하루가 힘겹다는 경희 자매 이야기. 다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의 말도 건네며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유나의 역할은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위로해 주며 이야기 나눔이 원활하게 진행되게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때였다. 유나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며 태연한 척 연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나의 눈물샘은 고장 난 수도꼭지 그 자체였다. 어려서부터 감정조절에 능숙한 본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고, 불같이 화를 내는 남편을 볼 때마다 진화가 덜된 미개인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뻐서 기쁨으로 펄쩍 뛰며 흥분을 주체 못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극도로 슬퍼하며 애통한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순종적이고 예의 바른 착한 딸로서의 도리를 다했던 유나였다. 결혼 후에는 착한 며느리라는 명찰을 한 개 더 달고 살았고, 당신들은 뒤끝 없는 화끈한 성격이라며 시댁 어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할 말 못 할 말 거리낌 없이 내뱉곤 했다.

결혼 후에도 '착한 딸'이라는 명찰 옆에 '착한 며느리'라고 적힌 명찰을 하나 더 달았을 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부모님들은 착하지만 할 말도 하는 며느리를 '화끈한 성격'이라며 좋아하셨다.


그동안 꾹꾹 누르고 눌러왔던 울분이 화산 폭발하듯 시뻘겋고 뜨거운 용암이 되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한번 터진 용암은 멈출 수가 없었고, 밝은 화장실 불빛 아래 비춘 거울 속 본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눈 화장과 볼터치는 다 지워졌고, 눈두덩이는 벌겋게 부어올라 따끔하기까지 했다. 유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엄마들이 유나의 폭풍 눈물은 유나 자신의 신세한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저 그들의 슬픈 사연 때문에 흘리는 것이라고 믿기를 원했다. 유나는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이 유나의 눈물의 이유가 그들을 향한 동정심 때문이라고 믿길 바랐다. 세련되고 완벽해 보이는 본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눈물의 근원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자녀 와의 갈등 때문이고, 당신들보다 더 심한 부부갈등을 겪고 있다고 유나는 차마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세련되고 완벽한 이미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이 눈물의 근원이 자녀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교회밴에서 본인의 테이블에서 나누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몇 개 나누고, 본인의 깊은 슬픔은 다시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다. 그렇게 그날도 그다음 주 모임에서도 눈물바다는 계속되었다.


<폭풍눈물> <착한 명찰의 무게> 소냐민정



"야야~ 니 꼴이 그게 뭐꼬? 젊디 젊은것이 …. 쯧쯧. 날이 이리 좋고 봄 꽃이 천지 삐까리에 널려 있는데 어쩌자고 내내 방구석에 쳐 박혀 있노 말이다. 니 어매도 니 이라고 있는 거 좋아하지 않을끼다. 좀 화사한 옷 입고 한번 나가봐라.”

카랑카랑한 옆집 해랑 엄마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온다.

엄마 간병을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고 김해로 내려온 지가 어느새 1년 반이나 되었다. 60여 년간을 서울서 지내다 건강상의 이유로 공기 좋은 고향 마을로 온 엄마는 처음엔 그리 달가워하지만은 않았다. 늘 그리워하던 곳이긴 했어도 엄마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서 온통 외로움만 배어있는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간암 말기로 힘들어하시면서도 "나이도 있고 하니 더 이상의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신 엄마를 위해 그저 남은 시간을 같이 하고 싶어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던진 수애는 어떤 후회도 없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남은 생의 기간 동안 열심히 가꾸던 남기고 간 화단은 주인은 가고 없어도 주인 없이도 여전히 형형색색으로 모양을 내고 얼굴을 내미는 꽃들이 한가득이다. 여전히 형형색색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후회가 없는 엄마와의 1년간 인생항해였지만 시간이었는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아침이 가고 저녁이 지나면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을 뿐.

수 없는 메시지가 핸드폰을 메우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전화가 함성을 질러대도 꿈적도 하지 않던 수애였다. 그런데 오늘 문득, 옆집 아지매 소리에 정신을 차려본다. 차린다. 반년 만에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수애는 낯설다. 툇마루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밥상을 들여다본다. 그녀가 좋아하는 청국장에 시래기나물이다. 웬일인지 식욕이 동한다. 한 숟갈 두 숟갈 뜨다 보니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뜨락으로 내려서서 정원을 돌아다본다. 엄마의 손길이 느껴지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 듯하다

“나 죽으면 화장하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인생의 길이 다 그런 것이 아니냐?” 고 하시던 말씀을 곱씹으며 떠올리며 마지막 예배를 같이 드렸던 집 앞의 작은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 수애야! “ 교회 언니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다. “안 그래도 매일 널 위해 기도했어. 몸은 어떠니? 이리 나온 거 보니 이젠 좀 괜찮아진 거로구나.”

몇 마디 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래, 이제 힘내어 살자. 마음속의 엄마를 훨훨 보내 드리자.”라고 다짐하는 순간,


“고객님 , 시간 다 되었습니다. 회상의 시간, 잘 누리셨는지요 즐기셨나요?” 네?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요?”

“아.. 잊으셨나 보군요. 기억나지 않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여긴 고객님들의 소원대로 보고 싶은 것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곳이에요 소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엄마와의 마지막 회상, 잘하셨죠? 어머님과 좋은 시간 되셨길 바랍니다. 이제 고객님 인생지도에 퍼즐 한 조각 갖다 붙이시면 됩니다. 멋진 추억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래 나도, 엄마도 안녕하자. 슬픔이여 안녕!”


퍼즐 카페… 최 성은 Sue




아들 유치원 때 부모 참여 수업시간이 있었다. 앞에 나가서 아이들이 각자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준우가 앞에 나가 다른 아이들하고 다르게 첫마디가 "장미꽃처럼 예쁜 우리 엄마"로 시작하여 엄마들이 감탄~~ 나도 감동받았었다. 발표를 하러 나간 준우의 첫마디는 '장미꽃처럼 예쁜 우리 엄마'로 시작했다. 다른 엄마들도 나도 감탄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진짜 엄마가 장미꽃 닮았어" 물어보니 "아니 그냥 집에 장미꽃이 있어서" 대박 묻지 말걸 ㅠㅠ


돌아올 때 선생님이 카드와 액자를 주셨는데 카드에는 "엄마 시험 100점 맞게 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고 액자는 준우가 쓴 우리 엄마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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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목소리가 편안한 우리 엄마


사슴처럼 얌전한 우리 엄마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나는 엄마를 축복해요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축복해요




그때 사이버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준우는 결혼 13년 만에 기적처럼 41살에 낳았다. 아들이야기 할 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다들 "귀하게 낳은 아들 아니세요?" 한다 가끔 내가 엄마가 아니라 사감선생님 같다는 생각을 들 때가 많았다.


준우 어릴 적에는 늘 주말도 없이 일이 많아 바빴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실제 준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신랑신부님들, 친구들 하고는 이야기가 끝이 없이 술술술 나오는데 준우랑 있을 때는 어떻게 놀아주어야 될지 몰라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말도 많고 수다스러운 엄마인데 ㅠㅠ 준우랑 있을 때는 얌전히 있었다 말하니, 책을 보거나 시험공부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집 1층 거실에 놓여있는 액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슬퍼지곤 했다.


많은 시간 할머니 손에 키워졌고 아빠랑 시간을 보내다 보니 보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아빠 사랑해" 이 말을 중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한다. 엄마는? 물으면 "엄마는 아니야 한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엄마 오늘 안 나가세요?" 하고 묻는다. 엄마가 집에 있으면 잔소리를 하고 듣고 엄마가 있는 날에는 외식을 못하니 엄마가 집에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아 서운할 때가 많아졌다.


준우 "오늘 안 나가세요?" 한다.


"준우야 엄마 슬퍼"

"왜요?"

"준우가 엄마 가지 마세요 하면 함께 못 놀아주어 슬프고"

"엄마 가세요? 엄마 오늘은 안 나가가세요? 하면 가라는 말 같아서 슬퍼"

했더니

"안 말 말아야겠다고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

고 한다.


길을 가다 다섯 살 남자아이를 보면 걸음이 멈춰서 보게 된다. 그 예뻤던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고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이 많이 슬프다. 러시아 전통인형(마트로시카)처럼 집에 한 살, 세 살, 다섯 살 , 일곱 살, 열 살 준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시간의 양보다 질이다' 말 하지만 내가 깨달은 건 시간의 양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님은 본인은 갈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손자가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하시지만 나는 하루하루 크는 것이 아쉽다. 자식도 품 안에 있을 때 자식이라고 하는데 내 품을 내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준우 가졌을 때 읽고 있던 책에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고 존경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글귀를 보고 (나와 성격이 정반대인 가정적이고 자연주의 남편이 외로울 거 같아 나두 일반적인 거랑 다르게 그랬으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고) 읽어주며 우리 아들도 그랬으면 좋겠네 하니 남편이 "그러세요"한다 하지만 지금은 살짝 바꿔 놓고 싶다 ㅎㅎ 똑똑한 척 은 혼자 다 한 것 같은데, 정작 지혜롭지 못했던 것 같다.


연말에 교회에 조금 일찍 도착했을 때 스크린에 떠 있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8]


2023년 무엇보다 오랜 시간 잘 챙기기 못했던 엄마, 아빠, 어머님, 남편,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빠, 남동생내외 조카들까지 챙기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늦었지만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기도를 한다.


<뻐꾸기엄마> GM김수정


진영은 그녀의 위선에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자식이 죽었는데 담담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 상황에 평화가 가능하냐는 말이다. 자식이 죽으면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그리움은 있을지 언정 고통은 없어 보였다. 소현은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구라도 아파할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평안함을 유지했다. 진영의 눈에는 그것이 아무리 보아도 가식이었다. 솔직하지 않은 것이고 가증스러울 만큼 위선적인 것이다.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하고 슬프면 슬픈 감정에 충실해야 인간답지 않은가?


진영은 소현이 자기를 친구로 생각하긴 하는 건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별로 속을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소현을 찾아 하소연을 하는 게 진영에게는 정해진 수순인 데도 말이다. 진영은 소현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소현은 진영의 모든 푸념을 세상에 다시없을 따뜻함으로 다정한 표정으로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그러고는 예외 없이 손을 뻗어 진영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소현이 괜찮다고 하면 갑자기 모든 혼란이 제자리를 찾고 정말로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이상스러울 만큼 잔잔한 평화가 잦아들곤 했다. 진영은 그런 묘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경험을 할 때마다 궁금했다. 도대체 소현이라는 친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둘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였지만 아직도 진영은 소현을 잘 알지 못했고 그것이 그녀를 이따금 외롭게 했다. 진영은 소현을 의지했지만 소현은 혼자서도 넉넉히 설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소현의 딸이 떠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딸을 잃은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끌어안고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진영이 바라본 친구의 얼굴에는 모든 일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평온함이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려고 마음 안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그랬다. 세상이 자신에게 내어주는 모든 경험을 두 팔 벌려 끌어안으며 삶의 순간순간을 그렇게 달게 받았다.


진영은 소현이 겪어야만 했던 많은 아픔들을 알고 있다. 진영이 아직도 그녀의 친구로서 자존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소현의 오래 묵은 고통을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아버지에게서 겪어야 했던 그 여름밤의 끔찍한 기억도, 결혼생활 20여 년이 흐른 뒤에서야 발견되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던 남편의 배신도 그녀를 거꾸러뜨리지는 못했다. 그녀는 많이 아파했지만 결국은 넘어서는 방법을 터득했다. 힘들고 슬픈 만큼 그녀는 다시 일어설 방법을 찾아내었다.


어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소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없어. 그러니까 과거가 던져줬던 아픔도 지금은 없는 거야. 과거가 아직도 있다면 그건 생각이 불러온 거야. 반복해서 곱씹지 않는다면 과거는 돌아올 일이 없지. 나에게 찾아온 모든 순간을 살아내려고 해.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경험은 나를 위해 하늘이 허락하신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그 모든 경험을 살아내려고 이 세상에 왔고 매일 조금씩 완성으로 가고 있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은 나를 더 성장시키려고 보내진 사람들일지도 몰라. 어찌 보면 원수를 가장한 은인인 셈이지.”

그녀의 궤변에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리는 정민을 담담히 바라보며 소현은 계속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나는 소중히 끌어안으려고 해. 아무런 판단이나 비판 없이 그냥 조용히 바라보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곤 하지.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이 오히려 허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성장한 모습으로 내 본향에 돌아가기 위해 지금 잠깐 이 공간에서 훈련의 시간을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난 슬플 필요가 없어. 슬플 일이 아니거든. 본향에 돌아가 맞이할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거니까.”


<슬퍼할 수 없는 이유> <그는 울지 않는다> 빵 굽는 엄마



따뜻한 햇살이 큰 창을 통해 비춰 들어온다. 나와 그이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아무 말 없이 지금의 고요함과 평안함만을 마음껏 느끼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다. 그 어떤 생각도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이다. 지금 이 시간 이곳은 눈부시게 밝은 햇살과 나, 그 사람 그리고 배 속에 아기뿐이다. 참 신기하다. 아기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아기가 느끼는 이 순간의 행복과 곧 사라져 버릴 이 행복에 대한 터질 것 같은 슬픔이 그대로 동시에 전해온다. 아기가 자세를 바꿔 아빠 쪽으로 손을 쭈욱 뻗어 본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처럼... 그 사람도 이런 아기의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손가락을 뻗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만져본다. 우리는 힘없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 사람의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원망스럽게도 더 힘이 없어 보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배 속에 아기는 잠을 자는 듯 조용하다. 아무 움직임도 느낄 수가 없다. 더 이상 그 사람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듯이 아이의 살아있음도 느낄 수가 없다. 옆을 지키는 사람들이 저마다 눈빛에 사랑, 염려 그리고 격려를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본다. 그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에 작지 않은 위로를 받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이 무거운 침묵이 깨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 밀려들 것 같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리고 분주하게 나를 집안으로 인도한다. 그 사람의 부재는 여기에 남은 모두에게 큰 슬픔과 그리움으로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이의 부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슬픔과 그리움으로 자리 잡았다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역시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니 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 이 슬픔이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슬픔이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된다.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따뜻한 햇빛을 보내 주었던 그 창을 통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밖을 내다보니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마당이 보인다. 잘 구획된 그 땅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개방된 텃밭 같았다. 각 구획마다 자기의 개성에 맞게 울타리도 만들고, 심어놓은 꽃과 야채도 다양하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석에 이끌리듯 그들 곁으로 다가가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들이 이름 모를 작은 야채를 손에 들고 어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밭일을 하고 있다. 마치 다음 해에 다시 찾을 보물을 땅에 묻는 것 같이 진지하면서도 무척이나 들떠있는 모습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가 가벼운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저 가벼운 눈웃음이지만 그 무게감은 절대 가볍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 웃음에서, 그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또 나를 진정 걱정하고 있다는 염려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좀 더 걷고 싶은 힘이 생겼다. 혹여나 내가 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을까 봐 계속 팔을 부축하며 나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는 여인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이렇게 함께 걷고 있었을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에 남아있는 에너지를 나의 한걸음 한걸음에 옮겨본다.


꽤나 넓은 마당을 빙 둘러 가운데로 들어가니 3층 높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버섯 모양의 나무가 서있다. 그 뿌리와 둥치는 마치 판타지영화에 나오는 마법의 나무처럼 서로 뒤틀려 나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고 둥치에서 시작된 가지들은 위로 뻗어 올라가다 버섯모양으로 둥글게 바닥을 향해 휘어져 있다. 이 거대한 버섯나무의 웅장함은 씩씩하다 못해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로도 신비한 느낌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지켜주마!'라고 말하는 숲 속의 전령 같다. 천천히 다가가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거칠고 뒤틀어진 까만 가지 사이사이로 눈처럼 하얀 꽃들이 자지러지게 피어있다. 장미다. 하얀 장미가 너무나 아름답게 버섯나무의 가지를 덮고 있다. 부드럽고 온화하게 활짝 웃으며 거친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거칠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나무와 하얀색의 작고 힘없는 장미가 이렇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니...


그 사람과 함께 나무의 씨앗을 심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핸드폰을 꺼내 나무의 모습을 담기 시작한 나는 더 위로, 더 위로,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계속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나무 가까이로 가고 있다. 그러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울컥 터져 나왔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작은 흐느낌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어본다. 그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다. 더 이상 이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함께 보지 못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나의 감정은 비탄, 절망, 슬픔이 아니다. 먹먹한 가슴을 안고 온 신경세포가 저려올 만큼 서글프게 울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나무를 보며 웃고 있는 나를 깨닫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잘할 거야. 내가 이렇게 늘 함께 할 거야. 걱정 마. 내가 너를 지켜줄 거야."라고 말하는듯하여 꿈속의 나는 너무나 슬프게 울며 동시에 너무나 기쁘게 울고 있다.

나에게 말하는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꿈속의 나는 울고 있었다. 슬픔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버섯나무> - 패미로얄-



지희에게 휘는 포근함, 안정되어 가는 포근한 안정감 같은 위로의 존재다. 휘에게 지희는 무엇으로 정의할 정의될 수 있을까? 휘는 알 수 없는 눈빛과 말들로 지희를 놀려 먹기 일쑤다. 지희가 짜증 내고 분노하면 휘는 좋아서 웃는다. 가끔은 ‘저렇게 웃으면 배꼽이 떨어지는 거구나'저렇게 웃다가 배꼽이 빠져버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장대소이다.들 정도다. 당연히 지희는 이 상황을 참을 수 없다. ‘ 이 미친놈아! 내가 지금 분통이 터져! 너에게 이야기를 하면 너는 내 편이 되어 줘야지! 내가 문제가 뭔지 몰라서 이렇게 침 튀기며 분노하고 있냐? 너한테 설교 듣고 싶어서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저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같이 욕 해 달라는 거지,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웃어? 그냥 웃고 있어?’ 이 미친놈은 또 한 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 미친개 또라이 변태 새끼야!‘ 지희는 휘를 한 대 때리고 다시 작전을 짠다. 단 한 번도 휘는 지희에게 져 주는 법이 없다.


휘는 가끔씩 지희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린다. 11월의 마지막 날 공항에서 지희를 기다리고 있다. 국내선인데 나오지를 않는 지희.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나온 거 같은데 딱 한 사람만 안 나온다. 성격 급한 휘는 팔짱을 끼고 오른쪽 다리에 힘주고 왼쪽 다리는 뻗은 채 출입구 중앙에서 째려보기 시작한다. 40분이 더 지났다.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그 순간, 보라색 파커를 입은 단발머리에 안경 쓴 여자애가 짐을 바리바리 들고 낑낑거리며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요?‘ 안녕하세요라는 말 대신 툭 튀어나온다. 그런 휘에게 지희는 ’ 안녕하세요? 제 짐이 제일 늦게 나와서 늦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지희가 귀엽게 느껴지는 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간다. 지희와 휘는 5년 전 이렇게 공항에서 만났다.


지희는 커피를 좋아한다. 아침에는 라테 중간중간 블랙으로 즐겨 마시는 지희. 그런 그녀를 휘는 종종 새로운 커피집으로 데려간다. ‘커피 마시러 가자.’라고 말하는 법은 절대 없다. 무슨 90년대 야타족인양 갑자기 전화해서 ‘나와.’ ‘타.’ 그리고 커피집 앞. ‘내려.’ 90년 대를 주름잡던 '야타족'이 돌아온 것 같다. 커피 마시는 내내 휘는 핸드폰만 한다 본다. 별로 말이 없다. 지희는 생각한다. ’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그러고는 주위를 살핀다. 새로운 도시에 적응이 쉽지 않지만 휘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줘서 지리를 익히고 있다.


휘에게 있어 새로운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것은 마치 첫 경험 같은 신비로움이자 모험이다. 일식, 중식, 양식, 이탤리언, 인디언 등등 세계 각지의 종류를 막론하고 레스토랑이 오픈을 하면 꼭 지희를 데리고 간다. 특히 지희가 매우 배고파할 때, 함께 가고 싶었던 식당이 있다며, 오늘은 이곳을 가 보자 한다. 흰 치아를 한껏 자랑하며 웃는 휘. 최근 인디언 식당에 지희를 데려갔다. 치킨티카살라마(인도 요리인지 영국 요리인지 논란이 되는 음식이라 한다)를 먹어봐야 한다며 구글평점과 별점을 비교하더니 어딘가에 벌써 주차를 한다. 오픈사인이 아직 켜져 있지 않은 상태. 지희는 또 구시렁거리고 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 배 고프다고!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야!’ 휘는 지희가 뭐라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구글 지도를 찾더니 근처 인디언 식당을 찾아낸다. 들어가자마자 인사하는 인도사람, 미용실에 온 듯 한 비닐 헤어캡을 쓰고 손에는 일회용 장갑을 끼고 있다. 접시도 개, 플라스틱 판매용 물 두 개, 냅킨 두장, 포크 두 개를 가져다주며 메뉴판을 건네는 인도 남자.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음을 지희 얼굴에서 발견하는 휘. 그래도 열심히 메뉴를 보더니 치킨티카 살라마와 두부 애피타이저 하나를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지희가 좋아하는 coke zero도 잊지 않는다. 지희는 레스토랑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문구를 하나 발견하는 지희, 그리고 휘에게 말을 건다. ’we do not have wifi.Talk to each other Pretend it’s 1996. 저 때 와이파이가 없었던가?‘ 핸드폰 속 뉴스를 보던 휘는 짧게 대답한다. ‘없었어’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희지만 배고파서 참는다. 주방 쪽에서 계속 기침하는 소리를 들은 지희는 또 한마디 한다. ‘여기 이상해. 주방 사람이 저렇게 기침을 하는데 음식이 괜찮을까?’ 말 끝나기 무섭게 안 어울리는 비닐 헤어캡을 쓴 인도 남자가 두부 애피타이저를 들고 나온다. 작은 일회용 종이 접시에 두부볶음 같은 것들이 올라가 있다. 휘는 한 입 먹자마자 코스코 두부임을 알아챈다. 지희는 이걸 만오천 원이나 주고 먹어야 하는 건지 또 구시렁 거린다. 두부를 다 먹을 때쯤 기대하던 치킨티카살라마가 나왔다. 비주얼은 버터치킨이랑 비슷하다. 한 입 베어 물은 휘는 말한다. ‘치킨이 오래된 거 같은데?’ 지희는 두 조각 정도 먹은 후 ‘못 먹겠어, 정말 오래된 치킨 같아.’ 휘와 지희는 남아있는 난을 조금 더 찍어 먹은 후 자리를 뜬다.


지희는 출근길에 생각에 잠긴다. ‘ 이 미친놈은 왜 항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거지?’ 휘에게 컴플레인을 시작하는 지희. ‘제발 새로운 곳에 나를 데려가지 말아 줘. 맛없으면 저곳에 사람들 안 데려가고, 맛있으면 자랑하고 초대해서 데려가려는 거 데려가서 자랑하려는 속셈인 것 내가 모를 줄 알아?‘ 휘는 씩 웃는다.

"눈치챘어? 너랑 이렇게 다니면서 맛집 찾아내고 맛없으면 컴플레인하는 너 얼굴 보는 게 내 기쁨이자 삶의 낙이야. 오늘도 나를 기쁘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오늘 엄청 배고프다 했어 안 했어? 다이어트하느라 많이도 못 먹는데 꼭 나를 이렇게 맛없는 곳에 데려와야 했어?"

휘가 박장대소 웃으며 말한다. "

몇 번을 이야기하냐? 수 천 번 수 억 번을 이야기했네. 이게 바로 나의 기쁨이라니까? 네가 이렇게 짜증 낼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난 행복하고 기쁜걸?"

지희는 이렇게 5년을 휘와 만나고 있다. 스스로를 질책하고 헤어지자를 반복해도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여전히 저런 휘를 좋아한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일어나는 지희와 휘는 어제도 오늘도 만나고 있다.



<너의 기쁨이 나의 슬픔이 되어갈 때> -JAcKY




숙희가 두 어린 딸들을 부산 친정집으로 내려보낸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곧 산달이 다가와 친정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겨야 했다. 우산을 팔아 돈을 벌어 오겠다는 남편은 6개월째 소식이 두절되었다. 게다가 시어른들은 "쓸데없는 가시나들 뭐 하려고 내가 봐주노.” 라며 가시 박힌 말들을 늘어놓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셋째를 가지기 전에는 그나마 멸치 장사라도 해서 끼니를 제 손으로 때워 시모의 쓴소리도 잠시 조용했다. 아이 하나는 띠에 매어 업어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에 이고 있는 멸치 박스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큰 아이에게는 잡아 줄 손이 없으니 치맛자락을 잡고 놓지 말라며 연신 당부했다. 힘들었어도 예전의 고생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거라고 위로했다.

모심고 밭을 매고도 잠시 쉴 틈 없이 새참 준비며 지붕 잇는 일까지 하느라 매일 밤 숙희는 팔다리를 주물러야 잠이 들었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었다. 대를 못 잇는 며느리 넘사스러워 어디에 내놓지도 못한다는 둥, 쓸데없는 가시나들 줄줄이 낳아놓고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냐는 둥, 셋째도 딸이면 밖에서 어데 사내아이 하나 낳아오라는 송곳 같은 몹쓸 말들이 숙희의 여린 가슴을 후벼 파내었다. 갖은 고생을 하는 딸이 안쓰러워 친정 엄마는 사글세라도 얻어 도시로 나오게끔 형편을 봐주었다. 그 덕에 숙희는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그 시골집을 뛰쳐나오다시피 나왔다. 얼음장같이 매서운 시모의 냉기에 비하면 혹독한 겨울 찬바람 냉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눈앞에 놓인 현실이 막막했고, 건사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쌀 한 포대를 위해 목청껏 소리쳐야 했다.

“메레치 사이소. 메레치 사이소 부산 메르치 왔스예.”

어릴 적부터 숙희를 따라 장사를 다녔던 큰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일찍 철이 들었다. 숙희가 목을 잠시 쉴 즈음이면 큰 아이가 대신 멸치 사라고 외쳐주었다. 큰 아이의 아이답지 않는 모습에 숙희는 고마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원망과 서러움이 가슴에 박힌 가시 같은 말들과 뭉쳐져 숙희의 온몸을 죄어옴을 느꼈다. 동시에 원망과 서러움이 가시가 되어 온몸을 찔렀다.

또 딸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아이의 생명줄은 끈질기게 길었다. 꼭 아들 낳기를 바라는 무당굿을 한판 벌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시모가 철학관에서 둘째 이름도 '재남'이라 받아와 마음대로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출산을 앞둔 무거워진 몸에 보태어 마음까지 얹어져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세상도 참 무심하시지 또 딸이다. 딸이라는 말에 시모는 아이 얼굴도 보지 않았다. 병원에 하루 더 있으라는 의사의 권유에도 시모는 일찍 숙희를 퇴원시켰다. 아들도 못 낳는 거 병원밥 필요 없다며 의사에게 손사래를 쳤다. 더 이상 어떠한 바람조차도 숙희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새 생명을 만나는 기쁨은 숙희에게 사치였고 여유로움이었다. 그저 다가올 후폭풍의 화살들을 방패막 하나 없이 전면에서 고스란히 맞을 일만 남았음에 허망했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가 기어나가 시모가 듣기라도 하면 또 난리를 칠 것이었다. 친정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구환을 해주러 와서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왔다. 뒤집어쓴 이불이 들썩 거리는 걸 보고 친정 엄마는 말없이 이불 위를 쓰다듬는다. 한참을 말없이 그러다 한마디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숙희야, 애썼다.”

숙희는 엄마의 손길에 서러움이 북받쳐 꺽꺽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이제 어떻게 사노.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아무것도 안 남았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겉다. 이거 불쌍해서 어떻게 키우노. 아이들한테 죄만 짓는다 내가.”

마음이 아파도 제대로 아프다 못한 숙희의 슬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친정모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렀다.

“오늘은 울어라 숙희야, 울고 싶은 만큼 울어라, 그래야 네가 산다. ”

따끈했던 미역국은 그렇게 식어만 갔다.


<울어야 산다> pinkpen



짝꿍을 만나서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왜 슬펐냐고요? 예비신랑이었던 남편이 아주 펑펑 울었던 날이 있었어요.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캐나다는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시청 관계자가 주례처럼 이야기를 해주고 서류에 신랑, 신부 측 증인 각 1명과 함께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해요. 우리는 한국에서도 결혼식을 해야 돼서 캐나다에서는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시청에 결혼식장을 예약하는 날, 남편은 무척 예민해져 있었어요. 제가 임신 중이라 남편이 배 가까이 핸드폰을 놓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못 알아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벌컥 화를 내더라고요. 저희도 결혼 준비하면서 싸운 거죠.

시청에 결혼식을 5월 초로 예약하고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갔어요. 제가 임신 초기였는데 먹고 싶었던 음식점에 가서 주문한 음식이 나온 순간, 남편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이건 뭐지! 레스토랑 밖으로 잠깐 나가서 달래 보았지만 그칠 줄 모르고 울어서 저도 같이 울었어요. 주변에 따가운 시선에 밥도 못 먹고 음식을 싸서 집으로 왔어요. 대부분 여자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로 싱숭생숭하지 않나요? 감성 풍부한 저의 남편이 저보다 더 싱숭생숭했을까요! 난 정말 민망했고 먹고 싶었던 음식도 제대로 못 먹어서 속상했다. 속상했어요. 임신했을 때 먹는 걸로 맘 상하는 일이 생기면 기억에 오래 남잖아요.

남편은 왜. 왜. 왜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펑펑 울었을까요? 남편은 정말 하루하루 재미나게 사는 사람이에요. 맛난 거 먹고 싶으면 금액 상관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저와 정 반대의 YOLO인 남편.

You Only Life Once.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생기고 아이까지. 남편에게는 생각도 깊게 안 해봤던 결혼도 해야 하고 그야말로 인생 대반전의 날이었던 거죠. 예비신부는 유학생에 영어로 완벽한 의사소통도 잘 안되니 어깨가 무척 무거웠데요. 무거웠대요.

아놔~~

그렇다고 그렇게 펑펑, 아주 펑펑 울 일인가요? 아니 30대 후반에 결혼하는데 한 번도 결혼 생각을 안 해봤대요? 저는 저에게는 이날이 어이없고 슬픈 날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

탤런트 전인화가 성유리에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전인화는 "결혼하기 전에 좋았던 모습이 결혼 후에는 단점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말에 공감이 100% 돼요. 항상 자상하게 설명해 주던 모습이 말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요. 레스토랑에서 웨이터, 웨이트리스가 남편에게 친절한 이유가 팁을 잘 줘서였어요. 자상한 남편의 모습은 저에게만 그런 건 아니었죠.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현실이 보이고 부부사이에 큰 상처로 남는 일이 있었어요.

2021년 1월, 둘째를 임신했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임신테스트기로 확인했는데 두 줄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이번엔 이상하게 믿기지 않아서 2번 더 해봤는데 3번 다 임신으로 나왔어요. 영주권이 없었던 저는 패밀리 닥터가 없어서 우선 미드와이프를 연결했고 7주 차에 첫 미팅을 예약했어요. 6주 차가 되었을 때 갑자기 하혈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남편에게 의사를 만나러 가지고 말했어요. 남편은 본인 패밀리닥터와 미드와이프에게 연락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봤어요. 그 당시 코로나로 워크인 클리닉도 문 닫은 곳이 많았고 병원도 편하게 갈 수 없는 상황이었죠. 남편은 저에게 "하혈을 많이 했다면 벌써 계류유산이 되었기 때문에 병원에 가도 어떤 조치를 받기 어려울 거다. 코로나로 응급실에 가는 게 더 위험하다."라고 전했어요. 저는 그래도 의사는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낮에 낮잠도 쿨쿨 잘만 자더라고요. 쿨쿨 낮잠을 잘도 자더라고요. 저는 2박 3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눈물을 흘리며 이것저것 검색해 보고 아기가 살아있기 바랐어요. 첫째 아이 임신했을 때도 하혈이 자주 있었지만 출산한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어요. 물컹한 핏덩이가 나오더라고요. 저는 빨리 의사를 만나고 싶어서 런던 지역 워크인 클리닉에 연락해 봤는데 연결되는 곳이 없었어요. 다행히 한 곳이 연결돼서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2층으로 올라간 남편은 바로 준비해서 내려오지 않고 절 또 기다리게 했어요. 저는 화가 나서 올라가 봤더니 그때서야 샤워한다며 화장실로 들어가더라고요. 저는 울면서 집을 나와서 무작정 걷다가 택시를 불러 클리닉에 도착했어요. 소변검사로 임신 확인을 다시 해봤는데 임신이 아니게 나왔어요. 벌써 계류유산된 상태였던 거죠. 너무 속상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이번에는 특히나 임신 초기에 아기가 나에게 찾아왔다고 많은 신호를 보내서 임신을 짐작했어요.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 게 마음 아프고 남편이 빠르게 대처해주지 않은 서운함과 원망이 컸아요.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2박 3일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까! 있지 않았을 텐데! 두 번째로 찾아온 아기를 보내면서 저는 많이 슬펐는데 남편은 너무나 덤덤한 모습에 더 슬펐어요. 주변에서는 유산한 것도 아이 낳는 것과 같다고 몸조리하라고들 했는데 하지만 첫째가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고 슬픔은 길게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첫 째 아이가 있어 충분히 쉬지도 못했어요. 슬퍼할 시간도 마음 놓고 가질 수 없는 현실이 슬펐어요.

결혼 전과 후_캐나다 아하


하얀 눈이 소복이 온 세상을 덮은 어느 날, 엄마아빠는 이제 우리가 밖에서 친구들과 같이 놀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학교도 갈 수 없다고 했다. 건물 밖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하고, 손은 소독해야 하고, 학교 공부도 숙제도 집 안에서만 해야 한다고 했다. 미나, 루나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도 유명한 삼총사이다. 우리는 진작부터 다음 주 토요일 볼링장에서 열릴 미나의 생일파티를 계획하며 초대장도 만들어 두었다. 생일파티의 테마인 유니콘에 맞추어 우리는 유니콘 머리띠도 사고, 유니콘 잠옷도 한벌씩 준비했다. 내일은 학교 끝나고, 몰에 들러 유니콘 인형을 사기로 했다.

집 밖을 나갈 수 없다니, 친구를 만날 수 없다니 이제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미나에게 생일파티에 못 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나와도 만날 길이 없다.

티브이에서는 소셜 버블이라는 단어가 CBC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소셜게더링이 힘들어지면서, 버블을 만들어 버블 안에서 2-3 가족정도만 만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엄마의 통화소리가 들려왔다. 미나엄마의 전화였다. 미나의 생일파티 이야기일 거라 확신이 들어 귀를 쫑긋하고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며 참석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빠가 노인요양시설에 근무를 해서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속상하고 답답했지만, 연신 미안하다는 엄마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좁은 집안에서 동생들과 함께 지내는 일은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다 막내 준이는 하루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내 공책에 침을 흘리고, 물을 쏟았다. 손아래 동생 연이는 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만 보면 쪼르르 달려와서 놀고 싶어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불고 떼를 썼다. 울음소리를 듣고 온 엄마는 늘 나에게 언니니까 양보하라고 했다. 너무 억울하고 짜증이 난다.

그렇게 몇 주간의 시간이 흐르고 학교가 다시 연다고 했을 때, 미나와 루나를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다시 학교에 간 첫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개인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며 예전에 서로 빌려주며 나눠 쓰던 인형놀이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얘기를 들어보니, 미나와 루나는 지난 몇 주간 소셜버블이라는 이름아래 여러 번 만나 함께 놀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버블 안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거리 두기라는 이상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동안 미나와 루나는 아리라는 친구와 버블 안에서 놀면서 새로운 삼총사를 결성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삼총사에서 추방당했고, 외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나는 미나 생일파티에 갈 수 없었을까? 왜 우리 아빠는 요양원에서 일을 해서 나를 이토록 외롭게 만든 것일까? 엄마는 아빠가 어려운 시기에도 매일 열심히 일을 하며 노인분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은 사람도 많지만, 아빠의 일이 오히려 더 바빠졌다고 했다.

늘 동생들에게 양보하라고 하는 엄마도 밉고, 요양원에서 일하는 아빠도 밉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거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코로나 다이어리> 세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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