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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클레어 Apr 18. 2019

이틀 전 응급 상황의 기록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그래도 삶에서 죽을 뻔 했던 경험은 많지 않으니 남겨두고 싶어 이렇게 글로 남긴다. 혹시나 다른 누군가도 항생제 알레르기를 발견하게 되면 참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4월 15일.

모 산부인과에서 난소 물혹을 제거하는 경화술을 받기로 했다.

작년부터 이 난소에 생긴, (그리고 크기가 커지는) 물혹 때문에 오랫동안 여러 병원에서 경과도 지켜보고 호르몬제도 처방 받아 왔었지만 차도가 없었기에 결국 수술을 결정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복강경 수술은 난소 소실이 30% 정도 있을 수 있다고 하기에, 난소 소실이 거의 없다고 하는 경화술을 선택했다.

경화술은 간단한 수술이었다.
초음파, MRI, 피검사 등 몇 가지 검사로 수술이 가능한 상태인지 확인한 후,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잡고, 수술 당일 6시간 금식 후 또 한번 간단한 검사를 진행하고 수술대로 올라선다.

수술대에 눕자, 항생제 알러지 반응을 테스트한다고 왼쪽 팔에 간단한 주사를 놓았고, 테스트 결과 아마 이상이 없는 듯 했다. 오른쪽 팔에 수면 마취제를 맞았고, 팔부터 뻐근함이 밀려오더니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나자 이미 수술은 끝나있었고, 나는 회복실로 이동했다.

몇 시간 회복 후 수술 경과를 확인했는데, 수술은 잘 끝났지만 배에 피와 물이 좀 차 있는 상태라고 혹시 모르니 하루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입원을 했고, 밤 동안 병원에서 또 한번 주사를 놔주었다. 항생제와 소염제? 라고 했던 것 같다. 그 때도 아무 이상은 없었다.


해맑게 보낸 병원에서의 하루



2019년 4월 16일.

깨자마자 또 한번 경과를 확인했다. 아직도 피와 물이 좀 있긴 하지만 이제 집에서 쉬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입원실이 불편하기도 하고, 식사로 주는 죽도 너무 맛이 없어서 (아마 오뚜기죽...) 오빠가 사 온 본죽을 들고 집에 가서 먹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식사 후 이제 3일간 이 약을 먹으면 된다며 식후 30분에 먹는 약을 주었다. 항생제라고 했다.

배에 불편감은 있었지만 약한 생리통 수준이었고, 생각보다 수술이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쉬다가 죽을 꺼내 먹었다. 아마 오전 11시쯤? 아플때마다 늘 먹는 전복죽이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약을 먹기 위해 식후 30분을 맞춰야지 하는 생각에 알람을 해뒀다. 20분쯤 지났을 때 기다리기 지쳐서 그냥 미리 약을 먹었다. 그리고 누워서 오빠가 틀어 둔 유투브를 같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까? 손이 엄청 가려웠다. 손이 가렵다니..... 태어나서 손이 가려운 적이 없었는데 손바닥이 뭔가 따끔따끔 하면서 엄청 가려웠다. "오빠 손이 가려워" 그랬더니 오빠가 엄청 웃었다. 손이 왜 가려워, 이러면서 손을 긁어줬다. 근데 갑자기 발도 가려웠다. "오빠 발도 가려워" 엥? 오빠는 그게 뭐야~ 이러면서 웃었다. 그런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쿵쿵 울리고 귀가 뜨거워져왔다. "오빠 나 귀 뜨겁지 않아?" 그런데 그 때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오빠의 표정이 변했다. 알러지 반응이 온 것 같애. 순식간에 눈과 입술이 퉁퉁 붓는게 느껴졌다. 거울을 보자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었다. 목까지 두드러기가 났다. "오빠, 지금 당장 병원에 전화해보자"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간호사가 일단은 다시 내원하시라고 안내를 했다. 병원까지는 30분 정도 거리였는데 차가 막힐 수도 있어 40분쯤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외투만 주워 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온 몸이 순식간에 부어올라서 목구멍도 붓는게 느껴졌다. 숨 쉬기가 힘들고 온 몸이 뜨거웠다. "오빠, 안 될 것 같애. 119 불러야 할 것 같애" 그래, 그러자. 오빠가 바로 앰뷸런스를 불렀고 옆에서 계속 나를 안정시켰다. 3분만 기다리면 돼. 3분만 기다리면 구급차 오고, 주사 놔줄거고 그러면 바로 가라 앉을거야.

앰뷸런스를 기다리는 몇 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는 들리는데 차들이 움직이질 않는다. (나는 다음에 운전하면 구급차 무조건 비켜줘야지.....) 구급차가 있는 곳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119에서 다시 전화가 와서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다. 길게만 느껴졌던 몇 분이 지나고 앰뷸런스에 누워 호흡기를 대고 가까운 국립의료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어찌나 차들이 비키질 않는지 오빠는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신은 없었지만 그저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도했다. 괜찮아. 도착하면 다 나아질거야. 힘든 호흡을 붙잡고 최대한 속으로 스스로를 안정시켰다.

다행히 국립 의료원이 가까이에 있어 금방 도착했다. 여러 명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이 몰려와 같은 질문을 했다. 증세가 어떠세요. 숨 쉬기 괜찮으세요? 병원에서 어떤 약 맞으신 거에요? 다행히 오빠가 병원에 모두 문의해둬서 나 대신 모두 대답해주었다. 오빠는 접수를 하러 가기도 하고 의사들과 대화를 해야해서 나가기도 했는데, 나는 몇 초라도 오빠가 옆에 없으면 엄청 불안한 마음이 들고 무서웠다.

눕자마자 팔에 주사 바늘들이 꽂혔다. 그리고 혈압과 맥박?을 재는 듯한 뭔가를 몸에 붙였다. 갑작스럽게 주사를 꽂아대는 통에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사약이 빨리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온 몸이 떨렸다. 여의사분이 나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혈압이 좀 낮아서 그런데, 이제 주사 들어가니까 괜찮을거에요. 스트레스 받으면 더 안 좋으니까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주사가 꽂혔는데도 초반 몇 분은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렸다. 혈압인지 맥박인지 뭘 나타내는지 모를 삑삑 소리가 자꾸만 음계가 낮아져 무서웠다.

이제 주사약 들어가서 괜찮을거야. 오빠도 그런 적 있어. 벌 알러지가 있는 오빠는 군대에서 행군할 때 벌 세 마리에 쏘여 호흡이 곤란해졌다가 주사를 맞고 나아졌던 경험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좀 안심이 됐다. 그래, 이제 약 맞았으니까 금방 나아질거야. 목이 막혀있는 것 같았지만 꾸준히 심호흡을 했다.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아니 사실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몸 떨림이 잦아들었다. 얼굴에 열도 내리는 것 같았다. 아 정말 별 거 아니었네, 응급실 괜히 왔다. 너무 많은 분들의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닐까? 구급차도 그렇고 응급실도 그렇고. 참 사람이 간사한게 진짜 죽을 거 같다 싶을 땐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들다가 나아지니 이제서야 염치가 생겼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주사 맞으면 바로 나아지는 거여서.

한 시간쯤 흘렀을까. 이젠 꽤 숨도 안정이 되었을 때 의사 분이 다시 들어오셔서 경과를 보고 말씀해주셨다. 119 부르시길 잘했어요. 호흡곤란도 오고 특히 혈압이 많이 떨어져서 생명이 위험했어요. 다음에도 이러면 무조건 구급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지연증이 있을지 모르니 4시간만 안정을 취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휴 그런거였구나. 위험한 상황이었구나. 직접 산부인과 다시 안 가고 구급차를 부르기 천만 다행이다. 나아지고 나니 내가 무슨 상황을 겪은 건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알레르기 직전 먹은 약은 타이레놀과 세파클러, 에티렌 총 세 알이었다. 그런데 타이레놀은 평생 먹어서 이상이 없었으니 의심 대상이 아니었다. 나머지 중 세파클러는 항생제, 에티렌은 소화제라는데 산부인과에서는 어제 내가 맞은 항생제가 세파클러와 크게 같은 군이라 그럴리가 없다고 죽 때문이 아니냐고 했다. 아니 죽은 오빠도 같이 먹었는데요.... 본죽 전복죽은 아플 때마다 수시로 먹었는데 한번도 알러지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에티렌을 의심했지만 응급실에서는 소화제로 그럴 확률은 낮고 아마 세파클러로 인해 생긴 아나필라식스(과민성 쇼크)가 의심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알려면 알레르기 내과에 가서 검사를 해야 한다니, 오는 금요일로 대학병원 예약를 잡았다.

역시 카이스트 출신인 오빠는 응급실에 누워있는 내 곁에서 언제 챙겨왔는지 모를 노트북을 꺼내 의학 논문을 찾더니 세파클러가 속한 항생제 군이 주사형태로 있을 때와 알약 형태로 있을 때 한쪽에서만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논문을 찾았다. 또한 첫 접촉일 때는 증상이 없다가 두 번째 접촉일때 그 때야 증상이 일어날 수도 있단다. 음 그래. 의대를 갔어도 분명 잘했겠지..... 오빠의 쏟아지는 대사들을 뒤로 하고 나는 응급실 침대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마침내 네 시간의 안정 기간이 끝나고, 과하게 술이 취해 응급실로 들어오신 한 아저씨를 옆 침대에 남겨둔채 (여담이지만 응급실 분들 정말 고생하신다. 그 분 정말 난동이었다. 응급실로 모셔오신 분은 좋은 뜻에서 모셔왔겠지만..... 계속 소리지르고 난동 피우시는 통에 주변 환자들은 다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유유히 응급실을 나왔다. 새 약을 받았고, 산부인과에서 준 약을 버리고 이걸 먹으면 된다고 했다.


다 끝났다!


뭔가 치열한 경험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남의 일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려웠던 기억을 일부러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응급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현실에서 해야 할 일들을 바삐 챙겼다. "오빠 기왕 나온 거 비자 사진 찍자" 화장도 안 한 채로 주변 사진관을 찾아 비자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와 비자 인터뷰를 신청한다고 밤까지 신청란을 채우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2019년 4월 17일.

새벽 다섯시쯤 깨서 밤 열 시까지 계속 뭔가를 했다. 읽기로 한 책을 읽고, 비자 인터뷰 신청을 마쳤으며, 집 계약 문제를 처리하고, 유튜브 초안 편집을 마쳤다. 평범하고도,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 마치 아주 옛날에 남에게 일어났던 일마냥 까마득했다.


2019년 4월 18일 0시.

그러다 자정이 지나고, 하루가 다 끝날때쯤 오빠의 제안으로 20분간 명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만큼 까마득했던 경험이 다시 마음 속에서 천천히 재생되었다. '무시할 경험이 아니라 경이롭게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경험이야' 이런 생각이 문득 마음 안에서 떠올랐다.


2019년 4월 18일 새벽 2시.

그래서 이렇게 이틀 전을 기억하는 글을 쓴다. 항생제 알러지일 뿐이고, 앞으로도 그 항생제를 피하면 되고 호들갑 떨 것도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단순한걸로도 죽을 위험을 겪었으니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된다. 아마 옛날에 알러지의 존재를 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겠지. 그만큼 나에게 이번 생에서 이렇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기억한다.
 
문득 수술날 탄 택시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독실한 기독교 신자 택시 기사 아저씨께도 감사하고, 나를 의료원으로 옮겨주신 119분들, 또 안정하라고 토닥여주신 응급실 의사 분들과 간호사분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그 순간 계속 함께 있어준 오빠와, 같이 있을 수 있었던 상황 자체에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모든게 생각하자면 당연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을 다시 기억하기로 한다. 죽을 뻔 한 날도 있었다고.


나의 오늘은 당연하지가 않다.
지금을, 놀랍도록,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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