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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영 Oct 04. 2020

독서노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강도높은 자기 객관화와 자기 포용

책을 다 읽고 나면 책마다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것은 대부분 그 책의 내용의 수준이나 깊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그것을 전달하는 화자의 에너지가 그 안에서 얼마만큼 공명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느낀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그런 의미에선 참 무거운 책이다. 

김원영 작가는 이 책에서 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들고 온다.
그 관점들을 풀어내는데 있어서 그는 <장애>라는 주제의 밖이 아닌,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조적인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경험한 실증적인 사례들을 담담하게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1. 품격주의자와 존엄주의자 
"우리가 장애나 질병, 또는 '핵토'라고 취급되는 내 신체의 외양과 기능이 주는 각종 한계와 멸시에 노련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고도로 성찰적인 자아를 가져야 한다. 이 자아는 타인의 시선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그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순간 그 의미를 분별하며, 그것이 자아의 본질로 공격해 들어올 때 진지를 구축한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의 본격적 분리). 성찰성을 발휘하면 '보여지는 나'가 앞장서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분노를 전개하는 변론자의 배역을 수행한다. 성찰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의 근본 조건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이 성찰능력을 잃지 않는 기술은 목욕과 수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극(퍼포먼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비극과 희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배역은 성실히 수행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마치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퍼포먼스)가 된다." 

공연에 능숙한 이들의 예시 중에서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자아를 위해서 특정 집단이나 타인을 대상화하는 이들과(품격주의자), 상호를 진심으로 배려하기에 작은 연극을 하는 이들 (김원영 작가의 어린 시절, 함께 놀고 있던 그의 친구들이 여름을 맞아 그를 두고 수영하러 나갈 때 '난 피부 보호해야 해'라며 집에 남아준 친구 한명과 같은, 존엄주의자)을 구분할 수 있다. 

2. 극복의 대상이 아닌 자각과 포용의 대상으로써의 장애 

1960년대 일본에서 (다소 급진적이라고 표현되는) 시작된 장애인 친목단체인 '푸른잔디회'는 그때까지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았던 시선과 다른 관점으로 장애를 바라본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1. 우리는 우리가 뇌성마비자라는 것을 자각한다. 

2. 우리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행한다. 
3.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4.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4. 우리는 비장애인 문명을 부정한다. 

이것은 극도로 높은 수준의 자기 수용이다. 사회가 정한 시선이나 잣대 뿐만 아니라 이동이나 주거, 의식주생활 모든 면에서 문제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 문제해결을 부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급진적인 관점은 장애인 자기 자신을 즉 자체로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어떠어떠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누구, 혹은 어떠어떠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분야에 성과를 낸 누구처럼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적 성취가 있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관점이다. 

꼭 장애인이 아니더라도도, 이런 순도높은 자기 포용과 수용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근거를 찾기 나름이다. 자기 자신의 장점이나 성취들에서 찾는, 내적 동기가 자신에게서 오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타인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떠한 근거도 없이 그냥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순도높은 포용. 거기까지 다다르는데 있어서 김원영 작가의 사유의 무게는 어떠했을지, 또한 그 사유자체가 어느정도 성숙한 20대가 아닌 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 이르렀을지를 상상해보면 그 무게가 안타깝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3. 장애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앨 것인가? 

책에서는 장애를 없애는 것, 혹은 장애를 물려주는 것에 관련한 몇가지 사례가 나온다. 

하나는 청각 장애인 동성 부부가 체외수정을 하면서 역시 청각 장애인인 남성의 정자를 이용하여 아이를 가지려는 것에 대해서 (=청각 장애를 물려주려고 하는 의도) 그들을 비판하는 논쟁에 대한 것. 또 하나는 하우스라는 픽션 드라마에서 난쟁이 어머니의 난쟁이 딸이 일반인처럼 키가 커질 수 있는 수술을 권유받았을 때, "자신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충분히 마음에 든다며" 수술을 거부하는 사례. 


청각 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체계인 수화의 아름다움과 깊이, 그리고 그를 사용하는 사람들만의 강력한 동질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전자의 사례에 대해서는 '청각장애 역시 키가 큰 것, 흑인인 것' 처럼 물려주고 싶은 특질일 수 있다라고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느낌을 받은 반면 - 난쟁이라는 장애에 대해서는 딸이 실제로 그 특질을 자랑스러워했는데 혹은 엄마에게서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판단을 했는지 명확하게 알수는 없다는 식으로 부정한 편이었다. 장애를 표준적인 신체가 수행하는 것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능적 결함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결함 정도에도 등급(Grade)가 있다고 그 스스로도 생각할 수 밖에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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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장애인으로써의 '권리'가 아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매력'에 대한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다. 장애인들의 몸에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디보티즘을 페티쉬로 보아야 할 것인지, 이러한 취향이 얼마만큼 왜곡되었다고 우리는 인식해야 할지에 대하여 다층적으로 논증해본다. 


이 책을 읽고 연극을 하고 춤을 추는 무대 위의 김원영 배우도 만나보고 싶어졌고, 트레바리 모임에서 독서모임을 이끄는 클럽장 김원영씨도 만나보고 싶어졌다. 본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큰 아이덴티티를 부정하지 않고 뜯어보고 해체하고 다시 재조립했던 집념가. 그를 둘러싼 관점들을 법과 윤리, 미학의 철학적 논증들에 대입해서 풀어낼 수 있는 아카데미아 학자. 무대라는 공간에서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행동가로써의 김원영. 

부디 곧 만나서 그 책의 진동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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