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블라인드>,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

루벤을 따라

by 원도

※ 본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화 주인공의 심리를 아주 주관적인 시선으로 리뷰한 글입니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당신의 손끝에서 난 아름다웠어




오늘 30도가 넘을 거라는 뉴스를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아침부터 더워서 깼다. 침대가 절절 끓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눈으로 뒤덮인 영화! <블라인드> 되시겠다.

스틸컷을 보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0.1도 정도는 내려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짓말이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완벽한 엔딩'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내 기준).

잘 만든 영화라는 말을 좀 길게 해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후유증(positive)이 심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의 배경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우선 영화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고, 주연 남자 배우는 벨기에 사람이다.

그래서 왓챠에서 영화 정보를 검색했을 때

개봉 국가에 네덜란드/벨기에/불가리아가 뜨는 듯하다.

배우들이 쓰는 언어도 어느 나라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 또한 정확히 가늠되지 않는다.

마차를 타고 다니기도 하는 걸 보면 상당한 과거라는 것만 알 수 있다.

여러모로 이국적인 매력이 많은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외딴곳에 눈으로 덮인,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루벤(배우: 요런 셀데슬라흐츠)은 모종의 이유로 시력을 잃은 뒤

저택에 갇혀 괴물처럼 지낸다.

엄마가 고용한 모든 집사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탓에

그들 모두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저택에서 도망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낭독인으로 마리(배우: 핼리너 레인)가 오게 된다.

마리가 처음 저택에 온 날,

원래 하던 것처럼 반항하며 루벤은 컵과 쟁반을 집어던졌으나

어디서 무술을 연마했는지 마리는 그 집기들을 잡아내며 기선을 제압한다.

이후 루벤이 소리를 지르고 침도 뱉어보지만

당한 것의 3배 정도의 횟수로 뺨을 갈기고 목을 조르는 마리에게 완전 제압당한다.

이후 두 사람이 급속히 가까워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마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언제나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큰 옷을 입고,

최대한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없게 숨어 다닌다.

마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책 커버의 가죽 냄새와 책의 종이 냄새.

얼굴부터 발까지 커다란 흉터로 빼곡한 마리는


(여기서부터 스포입니다.)

사실 가정폭력의 희생자다.

폭력의 주체가 직접적으로 엄마다, 라고 보여주는 장면은 없지만

마리가 어린 시절부터 당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가해자가 엄마 혹은 주 양육자임을 넌지시 짐작만 할 수 있다.

가해자는 마리가 못생겼다고 소리 지르며

거울에 마리의 얼굴을 처박아버렸고,

유리 파편에 의해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새겨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루벤이 세상을 향해 절규했다면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린 마리는 애써 세상을 외면하고 산 셈.

비극이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이 무언가를 식별하는 방법은

손 끝으로 만지고 향기를 맡는 것.

상처를 들키기 싫어 루벤의 손길을 거부하던 마리는,

루벤이 자신의 상처를 만진 뒤 "얼음꽃"이라 표현할 때 마음을 열게 된다.

마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여정이 동은이의 "흉터"라는 말을 "상처"라고 정정한 것처럼.


마리는 루벤에게 여러 번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고 눈은 초록색이라고.

루벤은 마리가 하는 말을 믿고 손으로 만져보며

자신만의 마리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그러다 루벤에게 눈 수술의 기회가 찾아온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 루벤이 떠날 거라는 생각에,

마리는 편지 한 장을 놓고 먼저 루벤 곁에서 떠난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이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루벤은 안경을 끼면서 마침내 앞을 보게 된다.

하지만 평생 보이지 않는 상태로 살았던 루벤에게,

갑자기 나타난 세상의 모든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다 자꾸만 날에 살을 베이던 루벤은

안대를 쓰고 면도를 한다. 베이지도 않고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이게 루벤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었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마리를 그리워하던 루벤은 우연히 어느 도서관에 들러,

마리가 매일 읽어주었던 <눈의 여왕>을 대출하려 한다.

하필 그 도서관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마리를 마주치지만

루벤은 알아보지 못한다.

당연하다. 마리의 얼굴을 본 적 없었으니까.

오히려 얼굴의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란다.

하지만 마리가 옆을 지나가는 순 루벤은 바로 마리의 냄새임을 알아챈다.

그리고 책을 읽어달라 부탁하고,

원래 해왔던 것처럼 눈을 감고 마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확신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리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도 사랑을 고백하는 루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워낙 깊어 그런 루벤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리.

마리는 또 어디론가 도망친다.

이후 루벤은 자신의 엄마가 감춰두었던, 마리의 편지를 읽게 된다.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엔딩이 진짜 미쳤다.

'미쳤다'는 표현은 진짜 쓰기 싫다고 <서브스턴스> 리뷰에서 밝혔지만,

나의 어휘력의 한계일까? (YES)

어쩐지 미쳤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왜 날 떠났어?"

"네가 눈을 떴으니까."


마리의 대답에,

루벤은 다른 방식으로는 마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마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루벤은,

주위 풍경을 한 번 쓱 훑어본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표정으로.

그리고 고드름 두 개를 자신의 눈에 찔러버린다.

원래 살아왔던 방식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방식으로 마리와 사랑하며 살기 위해.




common.jpg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표현법은 시종일관 투박하고 거칠다.

사랑을 위해 장애를 도구로 썼냐며 화가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오빠가 장애인이라 당사자성이 있는 입장에서,

오빠가 사랑을 위해 기껏 받은 수술을 포기하고 돌아가겠다고 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시각'을 '장애'가 아닌 '살아온 방식'으로 보면 좋겠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끝이라는 '엔딩'이 아니라 '과정'만 있는 것 같은,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사전적 의미) 영화 <블라인드>.

해가 진 저녁, 어두운 방에서 보기 좋은 영화로 추천한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2화<서브스턴스>, 커튼 좀 달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