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 성 요한 기사단
9월 14일 수요일
새벽 6시에 눈이 떠졌다. 몸은 지중해 가까이에 떠 있지만, 생체시계는 서울에 있던 셈이다. 잠을 더 청해볼까 하다가 하루를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은 슬리마를 벗어나 보기로.
“세라, 굿모닝! ”
어제 인사를 나눈 스페인 친구 엘리아다. 숙소에는 나를 포함해 네 사람이 산다. 영어 공부하러 온 엘리아. 콜롬비아인 파블로 20대, 한 사람은 몰타에서 일하는 라트비아 출신 알버트. 엘리아 외에 다른 두 사람은 벌써 집을 나섰나 보다.
“오늘은 어디를 가요?”
“글쎄요. 좀 멀리 가보고 싶은데. 발레타를 한번 가볼까 해요.”
“좋아요. 지금은 출근 시간이니 버스보다 페리를 타는 게 좋을 거예요.”
슬리마 선착장에 도착하니 오전 8시, 벌써부터 뒷목에 닿는 햇살이 따갑다. 발레타로 향하는 페리를 타고 먼 여행을 가듯 바다를 바라본다. 건너편에 군함 모양으로 떠 있는 발레타가 한눈에 들어온다. 레몬 빛의 오래된 건물들과 돔 모양의 교회 지붕들, 도시는 성벽과 보루들에 둘러싸여 있다. 평온한 중세 도시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페리에서 내려 만난 발레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야외박물관이라는 별칭답다. 골목 어디를 찍어도 액자 속에 넣고 싶은 한 컷의 사진이 된다.
16세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발레타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중세 도시의 모습으로 수 세기 세월을 견뎌왔다. 하지만 발레타는 동시대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다. 구불구불한 골목 대신 네모반듯 격자 모양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도시를 만든 이들은 성 요한 기사단(Knights of St. John)으로 이들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발레타라는 계획도시를 탄생시켰다.
성 요한 기사단, 판타지 소설에 등장할 법한 이들의 정체는 유럽 귀족 출신의 성직자였다. 7세기부터 이슬람과 기독교가 시작한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순례단을 보호하려는 의료목적으로 창설된 ‘기사수도회’는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기독교에 빼앗긴 뒤 군사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주로 그리스 로도스섬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로도스에 있던 이들이 몰타에 안착한 것은 16세기 초반. 로도스섬을 이슬람 세력, 오스만튀르크에 빼앗긴 뒤였다. 당시 이슬람의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수 있는 술탄 술레이만은 북아프리카와 발칸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고 1521년부터 지중해로 발을 돌렸다. 이들의 기세에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섬에서 내쫓겼고, 10여 년간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이때 매년 매 두 마리를 잡아서 바치라는 조건을 붙여 기사단에게 몰타를 임대해 주겠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카를 5세.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는 통치하고 있던 몰타를 기사단에게 위탁해 골치 아픈 북아프리카 해적을 제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성 요한 기사단은 몰타상륙작전을 이행했고, 1530년부터 268년간 몰타를 통치했다.
발레타라는 도시가 생긴 건 기사단이 몰타 통치를 시작한 지 4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 기회를 제공한 이들은 오스만튀르크, 기사단에게서 로도스섬을 빼앗은 이들이 1565년 몰타에 진격해 온 것이다. 5백여 명의 성요한 구호기사단과 7천여 몰타인들은 5배가 넘는 4만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싸웠다. 사나흘이면 끝날 것이라 예측되던 전쟁은 4개월간 계속되었고, 열세로 보이던 몰타인과 기사단은 끝내 승리를 이끌었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성 요한기사단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작은 섬 몰타는 세계사에 부상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듬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상징적인 곳을 계획도시로 구상했다. 도시 이름은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Jean Parisot de la Vallete)’의 이름을 따서 ‘발레타’라 지었다.
교황청에서는 발레타에 건축가를 파견해 지원했다. 이탈리아인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파렐리(Francesco Laparelli)의 설계를 밑바탕으로 지롤라모 카사르(Girolamo Cassar)는 전쟁을 잘 치르기 위한 요새도시를 현실화했다. 격자형으로 반듯반듯하게 만들어진 길 위에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질서 있게 배치됐다. 그렇게 5년간의 노력 끝에 1571년 완성된 발레타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종소리가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들 사이로 울려 퍼진다. 규모나 분위기가 서울로 치면 북촌에서 인사동까지 걷는 느낌이랄까. 발레타의 면적은 0.8·㎢, 근처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의 면적이 1,258㎢임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반전의 매력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16세기의 역사 위에 오늘날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관공서들, 대한민국 명예영사관, 몰타 이민국, 도서관 등이 모두 밀집되어 있다. 건물마다 내놓은 야외석에서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몰타의 전통 요리를 즐기고 있다.
사람 구경, 거리 구경을 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커다란 성당이 시선을 압도한다. 성 요한 대성당(St. John’s Co-Cathedral)이다. 발레타 중심에 놓인 성 요한 대성당은 기사단이 지배했던 시절의 핵심적인 역사를 압축해 놓았다고 한다. 성 요한 기사단은 같은 목적으로 연합했지만 출신도 쓰는 언어도 달랐다. 유럽의 8개 지역에서 온 이들은 옷차림부터 예배 방식까지 각 나라의 전통을 지켰다. 그러면 오늘날 발레타를 돌아다니는 것은 유럽 8개국의 중세를 집약적으로 구경하는, ‘속성 관광’ 같은 걸까?
발레타에는 어떤 곳은 스페인의, 어떤 곳은 독일의, 어떤 곳은 이태리의 중세가 있다. 발 닿는 곳이 모두 유적지이고 박물관이다.
성 요한 성당 방문은 다른 날을 기약하고 천천히 발레타의 뒷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인 두세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은 품격이 있다. 입구부터 끝까지 걸어서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작은 수도, 발레타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 도시가 특별한 이유는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 현대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살아있는 유적지이기 때문일 거라고.
* 관광지
<더 몰타 익스피리언스 The Malta Experience 영상 박물관>
로마, 아랍, 나폴레옹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몰타의 역사를 눈으로 보거나 체험할 수 있다.
<몰타 파이브디 Malta 5D 영상 체험관>
좀 더 생생하게 몰타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움직이는 좌석에 앉아 실제로 빵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어퍼바라카 가든(Upper Barrakka Gardens)>
17세기 이탈리안 기사에 의해 만들어진 어퍼바라카 공원. 풍류와 멋을 즐기는 이탈리아 기사단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랜드 하버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 전망대이다. 특히 발레타 건설 전 수도였던 쓰리 씨티즈 (Vittoriosa, Senglea, Cospicua)를 한눈에 볼 수도 있다. 영화 촬영지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성 엘모 요새, 리카솔리 요새, 성 안젤로 요새 등도 보인다. 어퍼바라카 가든 아래에는 대포들이 쭉 늘어서 있는데 매일 오후 12시, 오후 4시 정각에 영국포병대 복장을 한 몰타 병사들이 축포를 터뜨린다.
<로어 바라카 가든(Lower Barrakka Gardens)>
몰타인이 가장 사랑한 영국인 알렉산더 볼(Alexander Ball)에게 헌정된 기념비가 돋보이는 공원. 그랜드 하버와 추모의 종을 감상할 수 있는 정원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이다.
<추모의 종 (Siege Bell War Memorial)>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몰타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의 작전을 감독하는 연합군의 기지가 되었다. 1942년 영국은 세계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며 몰타에 성조지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추모의 종은 그로부터 50년 후인 1992년, 세계 2차 대전 당시 희생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