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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oi Dec 18. 2023

무작정 떠난 춘천 여행기

무계획 여행의 추억


 갑자기 떠났던 무계획 여행의 참맛은 그해 겨울 여행이었다. 이십 대 초반 대학생쯤이었는지, 취업준비생이었을 때인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돼버린, 그 옛 여행이 눈 오는 겨울날이면 자주 떠오른다.

 


 춘천으로 떠날지를 정하던 때는 기차 시간이 1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우리는 네이트온 채팅창에서 이야기 중이었다. 창밖에는 한참 전부터 내린 함박눈이 쌓이다 못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눈이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나 이런 날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 오늘 갈까? 내 말에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기차표를 알아보니까. 앞으로 1시간 뒤면 출발하는 춘천행 기차표가 있어.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니까. 지금 준비하고 바로 떠나면 될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MBTI에서 J 유형(judging/판단형의 사람들은 정확한 목표를 수립하고, 그에 맞춰서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는 것을 선호한다)이었을 그 친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출발역을 고려한 출발시간까지 분 단위로,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것들을 알려줬다. 청량리역에서 만나자는 채팅을 마지막으로, 지체할 것도 없이 꽁꽁 싸맨 옷차림에 지갑과 카메라만을 챙긴 채 택시에 올랐다.


 청량리역에 빠르면 열차 출발 10분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았지만, 우리 예상과는 달리, 2, 3분도 남지 않았을 때 기차표를 살 수 있었고, 표를 받자마자 직원의 다급했던 '뛰세요.'라는 말에 우리는 홀린 듯, 계단을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기차에 뛰어들자마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에 탔다는 안도감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무작정 떠나온 여행, 이 낯선 상황이 그저 재미있었다. 기차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설경에 이보다도 완벽할 겨울 여행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참 필름 카메라에 빠져있었고, 펜탁스 MX에 애칭까지 붙여줄 정도로 어딜 가든 카메라와 함께였다. 드디어 이 카메라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였을 춘천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과 그 눈 덮인 춘천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에 입석으로 한참을 서 있어야 할 그 시간이 힘들지가 않았다. 독립을 준비하던 중, 불필요하다며 버려버린 필름들 속에 분명 그날이 담겨있을 텐데, 그날이 기억 속에만 남아있게 되어 뒤늦게 아쉽기만 하다.



 남춘천역에 내렸지만, 이동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인 도로에는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늦은

오후, 낯선 춘천의 대중교통 운행 일정을 알지 못해 답답하던 차에 근처에 지구대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지만, 순찰하러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눈 쌓인 춘천 거리를 걸으며 친구와 끝나지 않을 것처럼 했던 이야기들이 무엇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것은 흔한 닭갈비가 싫다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인 친구와 찾은 삼겹살집이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는 작은 브라운관 TV가 요즘 그 흔한 벽걸이 TV처럼 한쪽 나무 벽을 뚫고 박혀 있었다. 표현 그대로 박혀 있는 TV가 인상 깊었던 그 식당은 다음 춘천 여행 때도 방문했다. 눈이 내려 더욱 감성적으로 되었던 건지, 그 모든 상황이 운치라는 이름으로 내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 식당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꽁꽁 언 손으로 떠먹던 냉이된장국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삼겹살보다도 더 맛있어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다. 막차 표를 미리 예매했기 때문에 밥을 먹고 남은 시간에는 춘천 명동거리를 걸었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 기억난다. 잊지 못할 그날은 이제 오랜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추억에는 그날의 기분, 감정들까지도 남아있다.


 언제 또 그렇게 떠날 수 있을까. 눈 오는 날, 기차 시간이 1시간도 남지 않았음에도 여행을 결정하고, 출발 직전의 기차에 겨우 올라탔지만, 그 상황조차도 재미있기만 해 웃을 수 있던 여행을 또 할 수 있을지, 다시없을 그날이 오늘따라 더욱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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