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ASMR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여름의 긴 낮 때문일까. 나는 여름이 좋다. 하지만 뭐니 해도 여름이 좋은 것 중의 하나는 바다다.
만약, 누군가가 물어온다면, 나의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바다와 산 중 어디가 좋아?
'당연히! 나는 바다가 좋아.'
모래사장, 갯벌, 파도, 막혔던 숨이 뚫린 듯한 시원함, 그리고 물놀이 후 맛있는 라면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소지 않을까 싶다.
올해 처음 만난 바다는 양양 하조대에서였다. 1년 만에 마주한 올해 첫 바다, 맑은 하늘 아래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모래사장과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 비록 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그 바다는 더욱 잊지 못할 바다였다. 그날의 바다는 한껏 비를 머금은 구름 아래에서 회색빛 파도가 치고 있었고, 젊은 연인은 우리 앞에서 회색빛 파도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영화관의 관객이 된 듯했다. 모래사장에서 돗자리를 펴고 함께한 사람들과 수제버거와 맥주를 마셨다. 그날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기분 좋은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바다는 나에게 언제나 기분 좋은 장소였다. 물론 바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신비감과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오래전,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기 위해, 남해를 찾은 적이 있었다. 수영장에서 교육할 때와는 다르게 낮은 수온과 바닷물의 강렬한 짠맛에 다시 한번 바다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당황했고, 초반에는 제대로 유영하지 못했다. 강사님의 도움으로 바닷속에 들어가 배운 대로 호흡을 하며 유영하기 시작했다. 해수면과는 달리 바다 깊은 곳은 평온함 그 자체였고 나는 차차 평정심을 되찾았다. 바닷속에 들어가면 부력에 의해 상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웨이트벨트와 부력조절 기구(BCD)를 착용한다. 그렇게 중립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으로 부력을 조절하며 유영하다 보면, 바닷속에 안긴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새, 바닷속에서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천천히 상승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문득, 스쿠버 다이빙의 꽃은 '상승'이라는 강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배와 연결된 줄을 잡고 천천히 상승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상승과 정지를 반복하며 해수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햇빛이 바닷속에 비치기 시작할 때쯤 다시 상승을 멈추고 나는 한 곳에 정지해 있었다. 고요한 바닷속, 햇빛이 비쳐 푸르게 빛나는 바다, 내가 내쉰 호흡은 기포가 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소리, 그 기포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이것이 요즘 말하는 ASMR일까) 온갖 잡념들이 사라지고 나는 평온해진다. 그렇게 내가 바다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고, 또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깊은 수면 아래의 평온함과 포근함이 내가 느낀 바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알고 나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속 깊은 존재, 사람들과 관계하다 보면, 많은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 잠시 곁을 함께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만으로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을 알게 되면 될수록, 대화가 깊어지면 질수록, 내가 바닷속에서 내쉰 기포처럼 그 사람과의 대화가, 관계가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느리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포근할 그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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