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소비재가 넘쳐나는 자동화된 사회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소련과 아프리카의 작은 신생국에 이르기까지 ‘소비하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의 이상이 지배 중이다.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성을 생존 수단으로 삼는 호모 사피엔스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생존을 위협하거나 우리를 전반적인 파괴의 벼랑으로 몰고 가는데 오히려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가?
오늘날 소비하는 인간은 매일 새 물건을 살 수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비전이 발견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사회주의 국가는 완전한 소비가 가능해지는 언젠가 행복이 문 앞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 있지만 미국처럼 완전한 소비의 행복이 이미 폭넓은 계층에게 찾아온 나라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과연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는 점이다.
소비하는 인간은 모든 것을 소비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전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습득하던 인간의 창조와 문화가 낳은 풍요로운 세계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수동적이고 마음이 허전하며 불안하고 고립되었다고 느끼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소외감과 권태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따분하고 소외감에 시달리는 인간이 불안을 보상하는 방법으로 내면의 공허와 불안이 강박적 소비를 통해 치유된다고 느낀다.
강박적 소비의 대표적인 예가 폭식증. 우울이나 불안이 숨어있고 그것이 폭식증으로 표현된다.
일종의 병리적 증상이지만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느끼지 못한다.
경제구조가 늘어나는 소비를 발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절약이 경제적으로 확고한 원칙이었듯 지금은 소비가 확고한 원칙이다. 19세기에는 자본을 모으는 과정이 개인이 절약해야 했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자체가 스스로 자본을 충당한다. 사람들의 소비가 계속 늘어난다는 전제하에.
때문에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유혹해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하려 한다. 교묘한 광고를 이용해 산업은 인간을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제적, 관료적 거인을 만들어내며, 그 거인과 마주 선 개인은 작고 무력하다고 느낀다. 개인은 날이 갈수록 사회에서 영향력이 작아진다고 느껴 불안하다.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남들이 이룬 것을 나도 이루지 못하면 배우자와 친구들이 ‘패배자’로 여길 것이라는 불안이 만연한 것이다.
우정, 사랑, 존경 등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이는 승진(사회적 성공)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성공을 쫓아 평생을 바치고 그 본질을 깨달으면 이미 늙어버린 상태가 된다.
불안한 인간은 소비한다. 유혹당해 소비하는 인간은 다시 불안해진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고 세상 무엇도 활동적으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할수록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소비할수록 불안해진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생산이 강력해질수록 인간은 더욱더 무력감을 느끼는 악순환에 이르게 된다.
담배 건, 비누 건 모두 각자의 브랜드를 달고 있지만 본질은 똑같다. 말보로를 선택함으로써 권력을 경험하며 그 선택이 곧 자신이라고 여긴다. 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제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김 당했을 뿐이다.
어떤 브랜드가 더 많이 선택받았는지는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선택의 행위에서 자유와 권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행복은 갖고 싶은 것을 많이 가질 수 있는 것과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비할 만큼 돈이 많지 않다. 소비를 통해 우리는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인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는 건 애당초 즐길 수 없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저 바쁘게 움직이며 분주한 것이 아니다. 내면에서부터 활동적인 사람, 세상과 활동적으로 관계 맺고 연결되는 사람이다. 그는 삶의 과정에서 쉼 없이 변하고 모든 행동들을 통해 인성 또한 변한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과정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관심의 정도(질)를 보여준다. 정적이고 이기적이며 고립된 인간과 세상 안에 존재하며 활동적인 인간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 안에 함께 존재하며 세상에 자신을 내어준다. 삶의 과정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건 탐욕과 소유욕을 버려야지만 가능하다. 자신으로 꽉 찬 인간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줄 자유가 없다. 이기적인 자신을 우선 텅 비워야지만 다시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으로 자신을 채울 수 있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에 하나의 질문을 마주하고 인생의 매 순간 그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하루를 마치고 나면 너무 피곤해서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인간은 질문받은 자신을 바라본다.
-
한 줄 생각
세상을 관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탐욕과 소유욕을 버리며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소개한 시몬 베유는 세상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눈에 대해 고민했다면 에리히 프롬은 이 챕터에서 학습당한 탐욕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채우는 것도 조만간 누군가의 글을 통해 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