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슬로우 라이프를 찾아'(1)

리옹에서 스타트하다.

by Seraphim

<리옹 5구 아파트 베란다에서의 석양>




슬로우 라이프를 선택하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남편의 정기적인 수입, 경제적 여유, 번듯한 자가용, 24시간 대기 중 홈쇼핑 채널, 화려한 도시의 네온, 만물상 백화점 진열대, 진미로 가득하지만 먹어도 늘 허기진 갖가지 레스토랑들, 끝도 없이 나오는 신상들, 우울할 때 순간 위로를 주며 곁에 늘 머물던 신용카드들,..


아이가 일찍 떠나고 나서, 후에 몇 년은 삶에 애착 없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선택도 어떤 결정도 의미도 없이, 느낌도 없이, 생각도 없이 그렇게 대략 대강 그럭저럭 살아야만 했다. 더 무엇을 하려 해도 힘도 의욕도 사라진 짙은 어둠의 터널에 갇혀 있었다. 터널을 나와도 밖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고 터널 밖의 빛줄기가 너무 눈부셔 감당할 수 없을 땐 다시 터널 속 어둠에 잠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더 편안해지고 무디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그 터널 속 어둠은 위험한 것이었다. 우울함에 묶인 채, 그 안에서 무기력과 삶에 대한 방관과 방황이 서서히 자라잡기 시작했을 때는 그 공허함과 나약함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에고의 고집이 지독히 강했지만, 모태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치관의 중심이 된 신앙과 그 교리까지는 무너뜨리지 못했다. 30대의 폭발적인 열정과 욕심은 성공의 환희도 좌절의 깊은 수렁도 동시에 맛보게 했지만, 성공으로 보이는 자잘한 삶의 족적들은 열심히 하는 만큼 그 보다 더 심한 갈증과 욕구불만으로 이어졌고, 절망과 허무의 심연은 끝도 없이 깊었다.


40대에 시작된 무기력함과 삶의 능동성의 상실은 계속되었고,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약해서 곧 끊어질 것 같은 삶의 끈은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버텨 주었다.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오지 않았다. 견디기 위해 삶에서 물러나는 연습과 물러나서 머무르는 실전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소비는 가장 쉬운 돌파구처럼 보였지만, 바로 그것이 함정이 되어 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더는 열심히 사는 것의 의미도 상실했고 엄마로서의 의무도 해제된 슬픈 자유는 삶을 무기력과 회한으로 자주 흔들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에너지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다시 시작한 공부는 자아의 오만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존재함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 삶의 종식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다는 내 무의식의 신념은 생각보다 견고했고, 그것이 자신을 더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오만임을 인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음 안엔 전쟁의 소용돌이와 평화의 천사가 번갈아 돌아다니며 자아의 겸손함과 생에 대한 인내심을 끝없이 시험하고 있었다. 우울증과 자기기만을 좀 벗어났다며 기뻐하기 무섭게, 다음 날이면 다시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조금 배운 지식으로 남들은 가끔 상담도 해주고 조언도 주지만, 내 안의 나는 찾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늘 미궁이었다. 스님이 어떻게 하면 자기 머리를 깎을 수 있을까,


삶에 필요한 지식은 따로 있었다. 지식으로 안된다는 그 지혜,,, 삶의 외형을 꽉 채우고 있는 것들을 거둬내지 않고는 내면의 뭉쳐있는 덩어리들을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내 안의 나를 좀 더 편하게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했다. 나를 확인하고 이해해야 했다. 살던 그대로는 체바퀴일 뿐 더 이상의 치유는 안되었다.


남편은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물론 몇 년의 차이는 있겠지만, 50대에 이르면 결국 기다리고 있는 은퇴를 좀 일찍 앞당겨하고, 우리 부부는 저렴한 유학비용과 경제적인 생활비용으로 한동안 지낼 수 있는 도시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모든 안락과 초현대 문명의 편리가 총집합된 서울 살이 무궁무진한 혜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자발적 포기로 삶을 과거의 시간대로 돌려놓기로 했다.


예전에 일과 공부를 위해 미국 뉴욕과 앤아버에서 거주했던 경험을 생각하면, 미국으로의 선택이 쉬울 수 있지만, 물질 만능의 미국적 생활 방식은 우리의 성향에도 또 이후의 추구하려는 삶의 방식에도 맞지 않았고 경제적 부담도 오히려 서울 생활보다 더 클 거 같았기에 미련 없이 제외할 수 있었다.


언어면에서 영국도 고려 대상이었지만 역시 물가도 비싸고 날씨도 좋지 않아 제외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기억은 몇 년 전 프로방스를 여행하며 언젠가 와서 살 것 같은? 혹은 전원생활의 느낌을 주던, 살고 싶은 몇 개 소도시를 발견했었고, 결국 우리는 언어를 새로 배우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를 선택했다.


대도시 삶은 더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편리한 기능성과 그 혜택은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는 첫째, 파리를 제외한, 도시 중에서 비교적 조용하고 물가 착한 곳,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려는 경제학과 철학, 신학이 가능한 곳을 찾았다. 그 기준으로 몇 개 도시를 추렸고 날씨, 생활 여건 등을 고려하여 최종 리옹을 선정했다.


우린 유럽 생활을 계속 이어갈 계획을 세웠고, 서울의 아파트며 관련된 것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프랑스 어학원을 다녔다. 남편은 군 입대 전 불어를 제2 외국어로 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고, 나는 대학 때 불어에 관심이 있어 시작은 했으나. 그때는 영어 공부로도 충분히 바빴고 또 불어는 당시 인기가 없어, 동기 부여 부족으로 중단했지만, 후일에 습득하고 싶은 언어였다.


이주 계획을 대략 마무리하고, 프랑스 어학원 알리앙스와 종로의 학원을 거쳐 거의 7개월 정도 우리 부부는 서로 다른 코스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유학 비자 인터뷰를 마치고, 모든 정리를 끝내고, 서울의 프랑스 유학원에서 리옹의 한 어학원의 학기별 정식 과정에 미리 등록한 후, 2015년 리옹으로 날아왔다.


첫 3개월은 어학원과 가까운 임시 숙소에서 지내며, 어학원을 다니고, 거주할 동네를 찾아다녔고, 서울에서 미리 이메일로 연락하며 방문 약속을 했던 곳들을 구경하던 중, 알맞은 아파트를 찾게 되어 예상보다 빠르게 이사할 수 있었다.


리옹에서 슬로우 라이프는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다시 시작한 공부는 그 목표가 애매하다 보니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었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관계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에 대해서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