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이탈리아 여행-8 : 시에나, 피엔차, 발도르차 평원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 토스카나 투어를 잡았다. 토스카나 투어는 보통 와이너리에 방문해서 와인 시음을 하는 투어가 많다. 토스카나 지역이 이탈리아 와인의 심장부라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산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와인에 흥미가 없어 명소 방문에 집중하는 코스를 찾았다.
우리가 예약한 투어는 가이드님이 운행하는 차를 타고, 중세도시 시에나부터 피엔차, 발 도르차의 사이프러스 길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투어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앞서 여행과 다르게, 여기는 차를 렌트하지 않고는 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피렌체 시내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시에나(Siena)에 도착했다. 이곳은 중세 도시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산처럼 이어진다. 이른 아침, 도시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과거로 온 기분이 들게 했다.
캄포 광장(Piazza del Campo)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골목에서 가이드님이 팔리오 경마(Palio di Siena)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실제 경기 영상도 보여주셨다. 팔리오 경마는 400년 넘게 이어지는 전통인데, 현재도 1년에 두 번, 캄포 광장 바닥에 흙을 깔고 한다. 10개 콘트라다(구역) 대표 말과 기수가 나와 광장을 3바퀴 먼저 돌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이때, 기수가 떨어져도 말이 먼저 들어오면 우승으로 인정한다. 경기 영상을 보니 기수를 버리고 달리는 말도 많았다.
한편, 광장 주변의 옛 건물들이 문화재나 다름없는 곳에서 이런 과격한 경기를 여전히 이어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전통 덕에 현재까지도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것 같아 아이러니했다.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옛날 말들이 다녔을 비포장 길에 아스팔트를 깔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 외에는 14세기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 같은 모습이다.
이어서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으로 이동했다. 대성당으로 가는 계단 사이로, 붉은 벽돌 건물에서 하얀 대리석으로 바뀌게 된다.
시에나 대성당은 외관이 정말 아름답고 화려하다. 전면에 빠짐없이 조각 장식을 넣고, 다양한 색의 대리석을 퍼즐처럼 끼워 넣었다. 한편, 흰색과 진한 녹색(검정으로 보이는) 대리석을 교차 사용한 것은 시에나의 문장과 관련 있다고 한다. 시에나의 문장은 위쪽은 흰색, 아래쪽은 검은색으로 나뉜 흑백 방패 모양인데, 시에나를 건국한 인물들이 각각 흰말과 검은 말을 타고 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아침에 우산을 챙길까 말까 하다 하나만 챙기고, 그 하나를 시에나 도착해서 가이드님의 차에 두고 내렸더니 비를 만났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자유 시간인데 그냥 실내에 들어가 있기는 아쉬워서 대성당 옆 트럭에서 파는 우산을 사기로 했다. 마침 무채색 우산들 중에 눈에 띄는 우산이 보였다. 이탈리아 대표 관광 명소들이 프린팅 된 우산이었다. 엄마가 이미 다녀온 곳들과 곧 갈 곳들이 그려진 우산을 보고 기념품이라며 좋아했다. 덕분에 비가 와도 기분이 좋았다.
시에나에서 피엔차로 가는 길은 너무나 맑았다. 그리고 달리는 차에서 창문으로 본 풍경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끝없는 푸른 초원에 길쭉길쭉한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사이프러스는 보통 20~30m까지 자라는데, 농가나 농경지에 울타리나 담장을 대신해 일렬로 심거나, 농가나 수도원, 성곽으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 진입로를 보여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한편, 피엔차 시내에 도착하기 전에 가이드님이 잠깐 정차했다. 숙련된 전문가답게 여기가 포토 스팟이라며 구도를 잡아주셨다. 결과물을 보니 너무 멋있어서 합성 사진 같았다.
피엔차(Pienza)는 발도르차(Val d’Orcia) 언덕 위에 있는 인구 2천 명 내외가 사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꿈꾸던 '인간 중심의 이상적 도시'를 실제 구현한 곳이라고 한다. 드넓은 평원과 함께, 녹음과 대비되는 연한 황톳빛 석조 건물들을 보니 어렴풋이 르네상스 도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피엔차에는 Via dell’Amore(사랑의 길), Via del Bacio(키스의 길), Via della Fortuna(행운의 길) 같은 짧은 골목들이 있다. 이 골목에서 찍으면 발도르차 언덕을 배경으로 찍을 수 있다.
우리는 돌로 된 아치문 양 기둥에 서서 반전미를 보여주는 사진을 찍었다. 빛의 대비 덕분에, 아치문 너머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거 같다. 엄마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베스트 사진이라 평가했다.
자유 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소품 가게들을 구경했다. 골목골목이 예뻤고, 가게마다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이 많아서 시간이 금방 지났다.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가이드님과 이동했다.
이제 피렌체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가이드님이 또 차를 세우셨다. 바로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의 촬영지인 '막시무스의 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려서 본 풍경은 푸른 하늘 아래, 초록 잔디와 진녹색 사이프러스가 어우러져 그림 같았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지만, 화창한 날씨 덕분에 사진 찍는 내내 엄마와 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게다가 가이드님의 주문에 따라 사이프러스와 온갖 포즈로 찍었는데 그중 날아오르는 사진도 건졌다.
피렌체 시내에 도착하니 5시경이었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젤라또 집에 가서 1인 1컵씩 야무지게 사 먹었다. 마지막으로 베키오 다리도 건너고, 피렌체 대성당도 한번 더 보며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준 피렌체와 작별할 시간을 가졌다.
호텔로 가 체크아웃할 때 맡긴 캐리어를 끌고 매일 지나쳐 왔던 피렌체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드디어 여행 중에 제발 일어나지 않길 바란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