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 펍(Pub) 도장 깨기

대학원생을 위한 에일 트레일, 하루 만에 다섯 개 펍 섭렵

by 세런 Seren
대학원생 에일 트레일 소개글과 오늘 갈 펍 공지 메일

학기 시작하고 첫 주말을 맞는 금요일이다. 아침 9시 세미나 수업을 마치고 "Postgraduate Ale Trail (대학원생 에일 트레일)"을 기다렸다. (처음에 맥주 '에일'인 줄 모르고 '알레'라고 발음한 나) 요크 최고의 펍들에서 동료 (대학)원생들도 만나고 요크의 생동감 넘치는 펍 문화에 발 담가보라는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미리 신청서를 제출하니 오늘 갈 '엄선된 펍' 장소 공지가 메일로 왔다. 첫 장소인 Brew York로 갔다.


Brew York 여기가 진짜 요크 브루어리(양조장)

첫 장소 “Brew York”양조장(brewery)과 탭룸(taproom), 맥주홀(beer hall)이 있는 펍이었다. 2층이 맥주홀이고 1층에서는 포스터, 마그넷, 맥주잔, 옷과 모자 등 다양한 기념품을 팔았다. 먼저 도착해서 2층으로 갔는데 예약석도 안 보이고 누가 이벤트 참가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순간 잘못 온 건가 당황했다. 1층에 다시 내려왔더니 다행히 친구들을 만났다. 먼저 만난 친구 3명이 다 미국 출신이라 그런지, 'My Oxford Life'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속 여주가 뉴욕 출신인데 옥스퍼드 펍 문화를 체험하는 게 나온다!)


내가 마시려던 논 알코올 Loris 대신 레모네이드, 실화인가!

2층 홀에서 요크대 원생 컬리지 Wentworth를 책임지는 톰과 클레어를 만났다. 홀의 벤치 좌석에 둘러앉아 각자 주문한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 시간이 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사람들이 주문한 메뉴들을 보고 내 맥주를 주문하러 갔다. Loris라는 논 알코올(0.5%) Pale Ale을 주문했다. 그런데 직원이 여권이나 면허증 같은 실물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당황해서 찍어둔 사진과 모바일 학생증을 보여줬는데 안된다고 했다. 신분증 챙겨 오라는 말은 없었는데, 나 빼고 다들 신분증을 가져온 건가 매우 당황한 순간이었다. 결국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고 받아 와 앉으니 술을 못 마시냐고 물어봤다. 신분증이 없어 주문을 못 했다고 하니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어려 보이면 신분증 검사를 하는 거라니, 좋은 거겠지?)

한편 여기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와 얘기를 많이 나눴다. 한국을 가본 적 있고 한국 음식도 좋아해서 종종 해 먹는다고 한 게 너무 신기했다. (김치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냐고도 물어봤다.) 노르웨이에서 오로라를 꼭 보고 싶고, 최근에 노르웨이를 가려다 결국 덴마크를 다녀왔다고 했더니, 자기 부모님이 덴마크 출신이라 많이 갔었다고 했다. 빌룬(Billund)도 가봤다고 했더니, 레고랜드 다녀왔냐고 물어봐줘서 반가웠다. 한편 노르웨이를 가기 최적은 6~8월 여름이라고 했다. (이때 오로라는 못 보겠지만!)


두 번째 펍은 Spark라는 홍대 느낌의 펍
홍대 느낌인데 루프탑 뷰는 요크 명물, 'Clifford's Tower'

1시간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는 "Spark"라는 펍이었다. 이곳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홍대 루프탑 바 느낌의 펍으로 느껴졌다. 자리에 있는 QR코드로 주문할 수 있고, 푸드 코트라 식사 메뉴가 다양했다. 여기서는 내 앞에 앉은 미국 언니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애리조나 출신인 그녀는 생물고고학(Bioarchaeology)* 석사 과정을 위해 왔다고 했다. 학사 전공은 뭐였는지와 왜 이곳에서 석사를 하는지 물어봤더니 학사는 미국에서 고고학을 했는데, 생물고고학은 미국 내에 원하는 과정이 없어서 왔다고 했다. 혹시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봤냐고 물어봤는데 놀랍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기 전공을 얘기할 때면 이 질문을 종종 듣는다고 해서 귀여웠다. 한편 역사를 포함해 엄청 방대한 분야를 다루어야 할 거 같다고 했더니, 화학, 생물학, 언어 등도 같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내 수업은 Reading list가 많다고 징징댄 게 잠시 부끄러워지면서, 언니가 진정 존경스러웠다.


* 인류의 유해를 분석하여 과거 사람들의 삶, 건강, 식습관, 노동, 이동,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학문


세 번째 장소는 전통 펍 느낌의 "The Hop", 드디어 나의 첫 맥주 "Hell Rat (지옥의 쥐)"

세 번째 장소는 요크 시내에 좀 더 가까운 "The Hop"이라는 펍이었다. 입구 위에 있는 오크통들과 맥주 탭들이 있는 올드한 목재 카운터와 유럽식 타일, 벽마다 자리 잡은 옛 귀족들의 초상화 그림들이 멋있었다. 앞에 간 Brew York, Spark는 대학생들이 가는 힙한 곳이라면, 이곳은 전통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의 연령대도 높고, 가족 단위도 많이 보였다. 탭 근처 바 테이블에 부부처럼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서서 맥주와 마티니 같은 걸 드시는 게 인상적이었다. 또한 한국에서 삼겹살 집 가듯 어린애를 데리고 와 맥주 한 잔씩 놓고 대화 나누는 모습도 신기했다.

여기서 드디어 첫 펍 맥주를 영접했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Hell Rat'인데 독일 남부, 특히 뮌헨 지역에서 유래한 헬레스 라거(Helles Lager) 스타일의 맥주라고 한다. 뒤늦게 합류한 공학 석사 과정의 대만 친구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아직 런던에 가본 적이 없어서 10월 말 Consolidation week*에 런던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내가 가본 앤틱 마켓과 해리포터 스튜디오, 윈저성, 옥스퍼드, 뮤지컬 등을 추천해 주었다.


* 학기 중간이나 끝에 강의가 없는 기간을 두고 학생들이 배운 내용을 복습·정리하거나 과제·시험 준비를 하도록 마련된 주간 (어느 교수님은 이 기간이 '방학'이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네 번째 장소는 현지인이 가볍게 한 잔할 만한 "The Last Drop Inn"
미친 친화력의 푸들과 맥주 소믈리에 친구와 만남

네 번째 장소는 홀이 크지는 않고, 현대적이면서도 아늑한 느낌의 "The Last Drop Inn"이라는 펍이었다. 이곳에서 대만 친구와 나란히 신분증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두 번째라 실물 신분증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녀는 당황한 듯 나처럼 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려 했다. 직전에 한 잔 마신 게 있으니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나를 빼고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들은 간 곳마다 맥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네 번째쯤 되니까 슬슬 참가한 학생들이 사라졌다.

차(tea)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a cup of'를 줄여서 'cuppa'라고 발음하는 걸 영국인에게 들으니 신기했다. 나는 얼그레이 티를 좋아하는데, 여기는 요크셔 티만 마시는 거 같다고 했더니 계급 문화와 관련 있다고 했다. 얼그레이 티는 상위 귀족층이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차고, 요크셔 티는 working class가 마시는 카페인이 강한 티라고 했다. 클레어가 이 설명을 하면서 작은 찻잔을 드는 흉내를 냈다.

한편 첫 번째 펍에서부터 네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는 Beer Flight*를 주문해서 인상적이었던 친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그녀는 맥주를 사랑하는 친구였다. 맥주를 마시기 전 향까지 음미하면서 마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전문가(Expert), 와인 소믈리에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전혀 취한 거 같지 않다고 했더니 여기 오기 전에 뭘 먹고 왔고, 지금 가방에 비상식량 아닌 '비상 안주'인 크루아상이 있다고 했다. (안주가 크루아상이라니!) 그녀가 오늘 trail에서 방문하는 장소마다 맛볼 맥주들을 적어온 노트를 보여줬는데 준비까지 철저했다.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지만, 대충 알아들은 것 중에서 나도 뮌헨 호프브로이(Hofbräuhaus München)에 가 본 이야기와 최근에 덴마크에서 칼스버그 양조장 가서 마신 맥주가 맛있었다는 얘기를 했더니 신나 했다.


* 여러 가지 맥주를 작은 잔에 담아 한 번에 시음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테이스팅 세트, 보통은 3~5종의 다른 맥주가 작은 전용 잔에 담겨, 나무나 철제 트레이(보통 구멍 뚫린 판)에 꽂혀 나옴


오늘 나의 마지막 펍 'Pivni'

10명 안되게 남은 멤버가 다섯 번째 펍 "Pivni"로 향했다.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신분증을 확인하는 가드가 있어 펍 안에도 못 들어갈 뻔했다. 다행히 톰이 대만 친구와 내가 대학생이고 에일 트레일 중이라고 말해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니 맥주 주문할 때는 별 말이 없었다. 덕분에 톰이 추천해 줘서 주문하려 했던 알코올 사이다, Tilley’s Rhubarb Cider (루밥 사이다)를 드디어 마실 수 있었다. Rhubarb(루밥)은 붉은 셀러리처럼 생긴 줄기 식물인데 파이, 크럼블, 잼 등으로도 조리해 먹는 식재료라고 한다. 달달한 맛과 향이 내 취향에 맞았다.


3층은 다락방 느낌에 몇 백년 된 전통 가옥 체험하는 기분이다.

1층에서 주문한 음료를 들고 엄청 좁은 계단을 올라 홀로 갔다. 2층은 이미 만석이라 3층을 왔는데 전통 영국 가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모범생처럼 톰을 착실하게 따라온 미국 언니와 나, 톰과 대만 친구 넷이 앉아 대화를 나눴다. 영어 학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인상적이었다. 미국, 영국 출신이 두 사람은 제2외국어를 배울 동기나 의지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했다. 나는 사고방식부터 180도 바꿔야 하는 영어가 내 인생의 숙제 같아 부럽기만 했다. 나에게 제2외국어인 영어는 절실하고 필수인데, 그들에게 제2외국어는 옵션일 뿐이니 말이다. 여하간 '알루미늄' 발음 얘기가 나오면서 미국, 영국 영어의 차이도 이야기하고, 국제적으로 분쟁 있는 국가들에 대해서도 심오한 이야기가 오갔다.


쉠블즈 거리를 지나 나의 집으로

밤이 되니 춥고 술도 좀 마셨더니 피곤했다. 마지막 펍은 포기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대만 친구도 배가 고프다며 집에 가야겠다고 해서 톰을 포함해 다섯 명 정도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둘 다 off-campus 기숙사에 살아 쉠블즈 거리를 지나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오랜만에 본 밤의 쉠블즈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금요일 저녁 8시 경이라 사람들도 꽤 많았다. 영국 생활을 시작한 지 3주 차인데 이 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