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작가의 신작 《홍당무는 이제 안녕》
죄책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떳떳하지 못한 부정적인 마음이다. “발표 준비를 제대로 안 한 내 행동은 잘못됐어. 그래서 나는 발표를 망쳤어.”는 죄책감이고, “발표를 제대로 못한 나는 바보 같아. 멍청하게 발표를 다 망쳐 버렸어.”는 수치심이다. 죄책감이 양심과 같은 나의 내적 기준에 기인한 거라면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같은 외적 기준에 의한 감정이다. “더 준비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소홀했어.”는 죄책감, “준비가 소홀했던 내 발표를 보고 사람들이 우습게 봤을 거야.”는 수치심이다.
발표 불안은 생각의 습관이다. 발표와 관련된 내 생각이 대부분 부정적이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것과 연결되어 굳어져서 ‘습관’이 된 상태가 발표 불안이다. 이 부정적이고 불안한 생각에 따라 몸이 반응하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돌파구가 보인다.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서 그에 따른 몸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발표 불안을 극복하려는 핵심 방법의 하나다.
발표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계있다. 여러 사람 앞에 서서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편해진 사람은 청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화자의 발표를 예민하고 꼼꼼하게, 면밀히 살핀다. 이미 발표라는 행위 자체가 의식 속에 큰 이벤트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발표할 때 맹숭맹숭 건성으로 보기가 어렵다. 날카롭고 깐깐하게 보게 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은 내가 다른 이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다른 이가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내 발표 불안의 원인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판적으로 보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발표 불안을 극복하려면 ‘다른 사람을 보는 내 관점을 바꾸기’로 하자.
이렇게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타인의 시선에 대한 근육이 조금씩 생기게 된다. 이 근육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점차 더 단단해지면 최면 필터 없이도 현실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신 상태에서 청중을 보게 되면 타인의 시선은 그리 매섭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매섭게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나 자신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