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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Mar 11. 2023

카프카의 《변신》

수업을  준비하며


1883년 7월 3일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폭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불안과 고통을 겪으며 살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었던 카프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긴 했으나 1908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지켜본 노동 환경은 자본가의 갑질로 점철되어 있었고 노동자 개개인의 실존은 방구석에 처박힌 한 마리 '벌레'처럼 취급되어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바로 작품 속 '그레고리'처럼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약간씩은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키게 되어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글을 쓰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도 지난 삶에 얼룩져 있는 고통의 흔적을 이 책에 담았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행위 때문에 강요받았던 삶의 발자취를 기록했으며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자유를 꿈꾸지만 다시 현실에서 내동댕이쳐지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고백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낱 부속품처럼 인식되는 노동자의 고된 삶을 그는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 왔다. 그리고 더 이상 생계를 이을 수 없는, 경제력이 전무한 벌레 같은 존재로 살아갈 때 인간(가족) 관계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나는 현재 실존적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정체성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지, 관심과 존중을 받으며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를 조명해 본다. 내 꿈이 주변의 강요에 의해 무시되지 않고 있는지, 내 시간이 내 진로에 맞게 가치 있게 사용되고 있는지 한 번씩 점검해 보자. 거대한 바위를 높은 바위산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남학생이 정리한 <변신> 줄거리


나의 가족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내가 꾸린 가족 말고 나에게 주어진 가족. 위로부터 맺어진 가족. 엄마와 아빠, 형제 그리고 나.

나는 그들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단지 허울뿐인 가족인가, 진정 의미 있는 가족인가. 우리 가족의 색깔을 찾는다면 무슨 색이 어울릴까.


부모님과 형제를 떠올리면 나는 희뿌연 안개, 거무튀튀한 구름이 떠오른다. 회색빛이 감도는 커튼 같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한달음에 달려가 금방이라도 확 열어 제끼면 반갑다고 꼬리를 칠 수도 있지만 커튼을 걷기 위해선 애써 밝은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그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해서 가끔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그렇게 얇아졌다 두꺼워졌다 하는 가변형 관계.


멀리 있으면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면서도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 이내 피곤해지고 불편해져서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고 싶어지는, 그래서 정신적 자유와 해방감을 되찾고 싶어지는 작용ㆍ반작용의 관계. 육체가 거기에 가려고 애쓰는 동안 정신은 여기로 되돌아오려고 한다니. 내 이야기지만 너무 씁쓸하구만.


《변신》을 읽고 여러 생각이 많이 들긴 했다. 정리하긴 어렵지만. 내가 부모님께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만큼 왜 우리 부모님은 나를 생각하지 않을까. 보통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는데  - 물론 나도 부모님보다는 내 새끼들을 억만 갑절이나 사랑하지만 - 왜 우리 부모님은 나를 그다지 아낀다는 느낌이 안 드는가. 바쁜 나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이 하늘과 같아서일까? 아니면 당신들의 생활에 찌든 삶이 고개를 들 여유가 없어서일까? 내가 불편해하는 만큼 부모님도 나를 불편해하는 것일까.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운다면 서로에 대한 아주 작은 관심도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일까.


어제 토요일 오후, 수업이 끝난 후 정리를 하고 나니 5시 30분이 되었다. 집에 혼자 있을 엄마가 생각났고, 내일 생긴 일정 때문에 차라리 오늘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빠가 쉬시는 날은 내일이었지만 엄마랑은 외식을 하고 아빠 거는 포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저녁으로 라면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고, 라면을 좋아하는 엄마가 말했다. 엄마 먹고 싶은 거 사주러 가겠다고 내가 말했다. 그럼 추어탕을 먹자고 엄마가 제안했다. 그럼 그러자고, 아빠 거는 포장해서 갖고 오자고 내 계획을 말했다. 그 말에 엄마는 생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냥 집에서 쉬라고, 너도 피곤한데 굳이 오지 말고 쉬라고 했다. 그러더니 오빠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김치 냉장고를 주문했다더라는 맥락 없는 말을 꺼냈다. 오빠가 집에 온다는 것도 아니고 김치 냉장고가 온다는. 그건 갑자기 생뚱맞은 전개가 아니냐는 내 말에 엄마도 그렇긴 하다고 인정했다. 내가 사드린 것들에 대해서도 오빠한테 맥락 없는 자랑을 했었을까.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나는 가지 않기로 했고, 결국 엄마에게 내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엄마-아빠의 관계의 오래된 불편함과, 오빠에 대한 엄마의 애틋함에서 비롯된 일종의 심리적 거리감 때문인 거라고 정리가 됐다.


노력을 해도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는 것은 내 노력을 허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리사랑이라는 게 있는데......'라는 옛말에 꼬리를 또 물고 있었다.


양가에 드린 용돈을 합치면 1억이 넘는다. 신혼 때부터 매달 용돈을 드려왔다. 없어도 드리고 있으면 좀 더 드리고. 자식의 도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라기보다는 책무라고 느껴진다. 여행도 시켜드려야 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려야 하고 나중에 이사 가시면 가전도 바꿔 드려야 한다고.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책무를 다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책무감이 진정 사랑일까? 의무보다는 권리가, 권리보다는 존중이, 존중보다는 사랑이 더 앞서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받고 싶은 건 사랑인데 사랑보다는 의무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 아이러니. 나에게 부모님은 단지 책임질 대상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단순해지려고 한다. 덕분에 많이 해방되었다.


내 말은 기억 못 하고 오빠 말만 기억하는 엄마.

내 태몽은 기억 못 하고 오빠 태몽만 기억하는 엄마.

이젠 덤덤할 줄도 알고 밀어낼 줄도 알게 된 딸에게 여전히 가끔씩은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엄마를 그럼에도 나는 자주 생각한다. 뭐라도 사줘야 한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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