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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ul 27. 2023

20년 전의 기록

<22 전략> 실천 11일째


학생들에게 수업 때 읽어오는 필독서 이외에도 다른 책들을 빌려주고 감상문을 쓰는 숙제를 내준다. 중등 아이들은 1주에 한 권 이상을 넘기지는 못하지만 이번에는 집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방출하기로 했다.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다른 책들을 읽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2, 3년 전에도 성인들 대상의 도서를 읽는 아이가 있었다. 이 친구도 남학생이다. 지금은 고2가 됐고 서울 강남에 소재한 수도전기공고(마이스터고)에 진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나하고는 8년을 같이 보낸 친구. 키가 183 되었다는 그 친구. 그 반 아이들은 특히 내가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아이들인데 그중 두 명은 공부를 스스로 하는 습관이 밴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나중에 작가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너희들 이야기를 써도 되겠냐고 물었었다. 그 둘은 “정말요? 와!! 대박!! 그럼요. 쓰셔도 되죠!!”하고 대답했었다. 그중 183 남학생에겐 나도 읽지 못하는 책을 빌려주곤 했다. 그러면 1주일 만에 뚝딱 읽어 왔는데 내용을 얘기해 보라면 어떤 땐 절레절레 고개를 젓기도 했고 어떤 땐 일부분만 설명해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나보다 언제나 훌륭하고 멋있었다. 아마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수도공고 가서도 작년 첫 시험에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었다. 면접 연습도 나랑 했었는데. 짜식.


아무튼 오늘 가져갈 책들을 챙기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한 권을 들춰 보았다. <나무>라는 책. 속지를 넘기는데 제목만 쓰여있는 속지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위에는 남편의 글씨, 아래에는 내 글씨. 남편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후 나무 제목은 처음이네.     


라고 써 놓았고, 나는     


변덕스러운 것과 변덕스럽지 않은 것의 조화,
극단으로 치닫는 것과 그것을 절제하는 것과의 조화,
사랑받기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주기를 좋아하는 것과의 조화!!!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가르침(깨달음)을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ㅡㅡㅡ2003년 10월 18일에
ㅡㅡㅡㅡㅡ혜정이가 OO에게     


라고 적어 놓았다.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와!! 아들아, 이것 좀 봐. 엄마가 결혼하기 1년 전에 아빠한테 선물한 책이었어. 하고 아들 눈앞에 책을 들이밀었다. 아들은 어, 어, 알았어. 알았어. 엄마 저거 봐.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 리뷰, 하면서 자기가 보던 것을 또 들이민다. 우린 이렇게 서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 들이밀었다.      


2003년, 27살. 풋풋했던 나. 한창 연애하느라 바쁘고 산만했을 나를 떠올린다. 책을 읽고 책을 선물했다. 가장 좋은 선물이 그때도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난 아들들에게 생일선물로 책을 받는다. 물론 아이들은 돈만 지불한다. 크크. (한 번은 속옷 브라팬티 세트를 받았다. 그것도 내가 고른 것이지만^^)     


베르나 베르베르의 소설을 좋아했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도 좋아했다. 그들의 소설 전기파의 충격으로 나를 압도하는 비범함이 있었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라는 책에서섹스를 하다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에 도파민이 과분비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결말이 죽음에 이르렀던 것인지 아니면 영적 환상에 접촉했던 것인지 기억이 안 난다. 8월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10년,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책을 읽어본다는 건 그야말로 신성한 경험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책은 그대로지만 나는 변했고 달라졌다. 그래서 신성하다. 우리 학생들도 지금 읽는 책 내용이 곧 기억에서 사라질 것을 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지금의 나처럼 신성함과 짜릿함을 느끼지 않겠나.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성장하는 것이 근사하다. 나 역시도 죽기 전까지 책을 읽을 것을 맹세한다. 다른 건 몰라도 신체적 능력이 허락되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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