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간을 잤지만 아침 공기가 차고 왠지 몸도 찌뿌드드하니 아들들이 등교하고 난 후 한 시간만 더 자고 싶어 침대 위로 올라가 옆으로 누웠다. 1시간 타이머를 맞춰 놓고 잤지만 정직한 타이머가 울기 시작할 때 가차 없이 입을 막고 연이어 30분을 더 꿈속에서 헤매이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기록할 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이 꿈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을 펼치려다가 일단 노트북을 열었다.
part 1
토요일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남자아이들이 와서 책을 펼치고 왁자지껄 공론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떤 학부모님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우리 아들이랑 같이 수업할 친구들은 생겼어요?” 다짜고짜 묻는 어머니.
“아, 아직은 없어요. 어머니~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원래는 수업 시간에 전화를 받지 않는데 꿈은 현실과 달랐다.
“우리 아들 빨리 시켜야 되는데...” 조급함이 찐득하게 묻어있는 목소리로 어머니는 말끝을 질질 끌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아직 급한 건 아니에요~.” 평소라면 책을 많이 읽히고 계시라고 여러 가지 조언을 드렸을 텐데 꿈속에선 대사가 짧다.
수업이 끝났는데 어떤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어, 누구니?”
얼굴이 꾀죄죄한 어린아이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아무 말이 없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 코는 약간 벌름코, 얼굴형은 사각에 가까운 둥근 형이다. 머리는 예전 5000원에 깎을 수 있는 남자 헤어 전문샵에서 깎은 듯한 더벅머리에 머릿결이 유난히 뻣뻣해 보였다. 콧물이 흐른 자국이 거뭇거뭇한 얼굴에서 여기가 인중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이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어딘가에 숨겨둔 장난감이 없나 두 눈을 출렁이며 찾아본다. 대답 없는 너는 분명 조금 전에 나에게 전화한 어머니의 아들일 거라고 여지없는 계산이 똑 떨어진다. 그렇구나. 그분의 그 아들. 왜 엄마가 그렇게 애를 태우고 있었는지 알 것 같다. 사실 나는 초3부터 가르치는데 이 아이는 몇 살일까? 초3은 아닌 게 분명하고 내 눈에는 일곱 살 정도로 보인다. 초창기에는 일곱 살부터 가르치긴 했는데 이 아이를 어떡한담? 아이는 내 눈치를 보지도 않고 부산히 움직이며 이것저것 탐색한다. 어딘가 숨겨둔 먹을 것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순간 내 토요일 수업은 더 이상 없었던가? 헷갈린다. 오늘이 토요일이 맞나? 무슨 요일인지까지 헷갈린다. 핸드폰 달력도 보지 않고 그냥 머릿속으로만 헤아리고 있다. 앗, 오늘은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이었어. 금요일은 쉬는 시간 없이 내리 세 타임을 하는 날인데 수업할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고 대신 이 아이가 와 있다니.
part 2
장면이 바뀌었다.
집에서 두 아들과 같이 있었다. 각자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공간에서 따로 놀고 있는 상황. 두 아들은 지금보다 어린 모습이었다. 둘 다 초등학생.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뻥 뚫린 사무실처럼 벽이 없는 하나의 원룸 형태였고 팔각기둥 모양의 층고가 굉장히 높은 공간이었다. 특이한 것은 밖이 훤히 보이는, 다시 말해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통창이라는 것. 바깥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들판에 놓여 있는 것 같은 1층짜리 집. 단독주택. 남편은 없었고 내 마음은 평범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남자아이가 뒤쪽 문을 열고 우당탕탕 뛰어 들어왔다. 깜짝 놀랐다. 쟨 누구지?
“넌 누구니?”
“저 여기 옆에 사는 사람인데요?”
그 아이가 들어온 곳을 바라보니 문이 있었다. 문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그건 나무로 만든 문이었다. 문고리 손잡이도 있었다. 열린 문으로 빼꼼히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우리집처럼 통창의 원룸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일반 빌라와 비슷한 내부 구조였다. 바로 보인 곳에는 일자로 된 싱크대가 있는 주방과 주방 겸 거실인 작은 공간에 놓인 남색 천 소파가 있었다. 내부가 무척 좁았기 때문에 방도 1개나 2개가 있을 듯했다.
문 하나로 두 집이 붙어있는 구조라니. 게다 우리집은 미래의 집이고 붙어있는 옆집은 과거의 집 같다. 옆집은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몇십 년을 살아온 것 같고 우리집은 이제 막 지어서 생판 아무도 모르는, 아무런 유대감도 형성되지 못한 채 이제 겨우 적응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집이나 우리집이나 유대감은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아있기만 한 것 같은?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고 그냥 현재만 있는 느낌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아이는 우당탕탕 뛰다가 도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청년처럼 보이는 사내아이가 다시 그 문을 통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우리집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린아이야 이해하지만 저 청년의 행동은 뭐지? 어린 남자아이가 그 형을 뒤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다.
“형, 거기로 가는 건 안 돼!!” 뒤늦은 외침이었다. 형은 밖으로 이미 나갔는데 미리 얘기를 하던지. 자기는 되고 형은 안 되는 건 또 뭐야. 어이없는 집구석이었다. 형은 나이가 19살 정도는 돼 보였고 작은 아이는 이제 6살 정도인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저 형은 사촌형일 거라고 짐작했다. 게다 형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작은 아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니 형은 이 집에 살고 있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가만히 있어도 됐지만 나는 일부러 19살 그 청년을 따라갔다. 작은 아이가 “형, 거기로 가는 건 안 돼!”라고 외치지만 않았어도 얌전히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작은 아이도 알고 있는 ‘옆집 불가침 조약’이라는 것이 암암리에 형성되어 있는 거라면, 그렇게 덩치도 크고 이미 성인에 가까운 사람이 남의 집을 무단으로 횡단하는 건 불법 행위라는 걸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신발을 신고 나가 50미터 정도를 걸어갔다. 거기엔 매점이 있었다. 뭔가 먹을 걸 사러 갔겠지만 청년의 뒷모습이 깡패 같아서 무서웠다. 등발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신랑의 세 배 정도? 흔히 조폭이라 불리우는 남자들의 등발과 똑같았다. 계절은 여름이라 파란 하늘에 초록의 야자수가 그려진 비치웨어 같은 화려한 남방과 갈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조금 당당해야 했다. 그 모습에 주눅이 들어서는 콩알처럼 작아지리라. 정신줄을 붙잡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저기요~” 청년이 뒤돌아섰다. 얼굴도 크다.
“아까 우리집 통과해서 이렇게 나왔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면 뭔지 알아요? 주거 침입인 거예요.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은데 그건 법에 걸리는 거니까 미리 알려 주는 거예요. 앞으로 거기로 다니면 안 된다고. 알았어요?” 팔짱을 꼭 낀 채로 최대한 고압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인상도 쓰면서 술술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약간 고개를 숙이며 청년이 단순하게 대답했다.
아휴. 십 년을 감수했다. 그 청년은 덩치만 컸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였다. 순수한 냄새가 났다. 만약 단순한 놈도 아니고 순수한 놈도 아니었다면 나는 그 즉시 짐을 싸야 할지도 몰랐다.
가뿐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처음 나온 이 새로운 동네를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옆길로 빠졌다. 주변은 온통 잡풀이 무성했다. 어디서 났는지 나는 치킨 한 마리를 들고 있었다. 아니 먹고 있었다. 들고 있는 치킨의 넓적다리가 동강 나 떨어지려고 했다.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아저씨와 큰 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흠칫 놀라 멈춰 섰다. 더 가기는 무서웠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자. 치킨 냄새를 맡은 그 진돗개 같은 큰 개는 어쩔 줄 모르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닭다리 하나 달라고 보채거나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무사히 집까지 도망하기 위해선 별 수 없었다. 덜렁덜렁거리는 치킨 넓적다리를 던져 줄 수밖에. 진돗개 주인은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저 그렇게 치킨을 득템하고 열심히 물어뜯는 자기 개 옆에 덤덤히 서 있기만 했다. 어쩌면 빙그레 웃고 있었을까.
나는 무서운 마음에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에게 남은 치킨을 주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진정도 되기 전에 통창으로 비친 게 있었으니 그 진돗개였다. 진돗개가 치킨을 다 먹고 나를 뒤쫓아 온 것이다. 놀랄 겨를도 없이 갑자기 경찰차가 삐용삐용거리며 우리집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헉! 뭐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