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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Mar 02. 2022

나의 아저씨

아직 다 보진 못 했다


꽤 오래 전의 드라마다. 있는지도 몰랐던 드라마. 벌써 4년이나 흘러간 시간 속에 파묻혀 있던 드라마가 이제서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사실 초반에 보다가 접었었다. 흔하디 흔한 불륜에 삼각ㆍ사각형 러브라인, 회사 경영권을 둘러싼 암투와 불합리한 조직 문화, 더 가지려는 가진 자와 권력에 욕심 없는 못 가진 자, 땅굴 속으로 파고드는 외로움과 삶의 애환, 눈물도 주고 웃음도 주는 감동 스토리, 너무 뻔해서 몇 회 보고서 이미 싫증이 났다.


한 10년 정도를 끊었던 드라마에 다시 눈 뜨게 해 준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는 반가운 마음에 한껏 기대했는데 <또 오해영>만큼 설레지는 않았다. 설레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나고 머리가 아팠다. 어깨 잡고 싸우다가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몹시 서러워지는 삼 형제의 우애도 눈물겹다기보다는 지겨웠다. 그래, 그런 게 세상 살이지, 우리의 인생살이, 다 같이 어우러져 살지만 알고 보면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라는 뻔한 내용도 억지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털고 일어났다. 드라마를 보다 만다고 해서 일면식 없는 작가에게 일말의 예의도 없는 철면피라고 낙인찍힐 일도 없고 그저 그러고 말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끝까지 봤다. 나는 중도하차했는데 그는 끝까지 봤다. 작가에 대한 예의로써가 아니라 그냥 드라마가 좋아서 그 스토리와 그들의 삶에 빠져서 며칠을 줄곧 봤다. 나도 재밌냐고 묻지 않았고 우리 남편도 재밌으니 더 봐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워낙 강요라는 걸 안 하는 사람고 내 생각을 그대로 존중해 주는 사람이니까. 사람마다 주관적 해석과 드라마 취향이 다른 것뿐이고 <또 오해영>만큼 나만의 띵작은 아닌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작품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감히 작가를 저버려? 누가 너가 쓴 글을 읽다 말고 에이 별로네~ 하고 접어버리면 좋겠니? 자꾸 고요한 외침이 일었다. 아무리 별로인 작품이라도 그동안 들인 시간과 공을 생각하면 끝까지 보고 그다음에 평가를 해도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한 판단이라면 오해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거냐고 내가 나한테 자꾸 따져 물었다. 작가에게 자꾸 미안한 생각이 접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다시 보기 시작했다. 끝까지 다 보고 정말 별루였을 때 ‘난 별로였다’고 말하기로. 그냥 나 자신에게, 그 작가에게 동등한 기회를 다시 주기로 나 자신과 합의를 봤다.


남자 주인공 동훈(이선균 분)의 사람다운 멋, 인간미는 작품 내내 그려졌고 여자 주인공 지안(아이유 분)이 동훈을 이용하려다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것까지도 이미 예상 범위에 있었다. 그런데 12회 말미에 예기치 않은 반전이 숨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이 복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와 가슴을 아리게 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뜨거운 눈물을 맛보았다. 당황스러운 자리에서 덤덤하게 그동안 품었던 마음을 자기 목소리로 꺼내어 보이는 지안의 마음이 내 마음을 울렸다.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어쩌면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오늘 잘린다고 해도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아 봤고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이 회사에, 박동훈 부장님께 감사할 겁니다. 여기서 일했던 3개월이 21년 제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습니다. 지나가다 이 회사 건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고 평생 삼안 E&C가 잘 되길 바랄 겁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는 것,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그리고 있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준다는 것도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자신을 닮은 그(그녀)를 보며 한없이 불쌍해지다가도 오히려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어느새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래서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그(그녀)가 있어 더 이상 삶이 슬프지만은 않은 두 사람을 통해 작가는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아픈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거라고. 나이도 성별도 사회적 지위도 아무것도 상관없이 그냥 서로 꼭 닮아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고.


“용감하다. 근데 나 그렇게 괜찮은 놈 아니야. ”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도청기 속 동훈, 흐느끼며)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 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이런 대접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 버리라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어야 할 와이프에게는 버림받고 찢어발겨진 상태였지만 한낱 여직원에 불과한 직장 동료에게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나의 아저씨>였던 남자. 씁쓸한 웃음과 자기 연민.

하루에도 열두 번 외줄을 타고 있었다. 조마조마했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 헛디딜 줄 몰라 두려웠다.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외줄 위에서 손 잡아주고 같이 널을 뛰어주려는 용감한 한 사람이 있었다. 이미 21년 간 숱한 외줄을 타고 있었던 사람, 외로움의 긴 줄을 이미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우리 인간은 외롭다. 외로움의 연속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외로움의 긴 줄을 서로 맞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나를 잘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인생은 외롭지 않다. 슬프지 않다. 얼어붙은 땅에서 피어나는 들꽃 같은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힘 테니까.


인생은 살 만하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지만 인생은 외롭지 않은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줌씩의 따뜻함은 갖고 태어났으까.


어느 작품이든 독자(관람객)의 마음을 울리는 한 컷이 있었다면 잊고 싶지 않은 작품이 된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작가가 된다. 박해영 작가도 그렇다. 오해할 뻔해서 미안했다. 나태주 시인이, 시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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