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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un 23. 2024

오늘도 한 발 내디뎠습니다


인생이 재미있는 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계획한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는 나를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에 데려다 놓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생각은 했었지만 마흔 여덟인 지금 내가 상담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줄을 미리 알지 못했고, 새로운 동료들 가운데 뜻 맞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내가 강남역을 처음으로 밟아보고 그 흔하디 흔한 빌딩숲에 서서 넓적한 이파리를 한가득 붙잡고 있는 키 큰 나무들을 올려다보게 되리라는 것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시골에 사는 것도 아닌데 강남땅에 가서 도회적인 분위기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생각하며 사진을 한 방 찍고 내가 이렇게 촌년이었나 하고 혼자 민망해할 줄도 나는 알지  못했다. 일요일에는 지하철이 한가하겠지 했는데 아니 웬걸, 사람들은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평일처럼 앉을 자리도 없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걷는 이 인생길이 즐겁고 시시각각이 새로운 것이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심리상담센터에 다녀왔다. 인턴으로 지원서를 내기 위한 것과 공개사례발표(약칭 공사발)를 참관하기 위한 것,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공개사례발표의 분위기와 진행 방식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상담센터의 인턴, 레지던트로 계시는 선생님들이 주된 참석자들이었고, 외부에서 온 사람은 나와 다른 한 분밖에 없었다. 인생은 참 재미있게도 그 다른 한 분을 내가 아는 분으로 예비해 줌으로써 그분과 나를 동시에 깜짝 놀래켰다. (어머! 선생님!!!)



공사발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곧바로 흡수되어 궁금한 점, 나름대로 분석한 점을 여과 없이 표출했고, 발표하시는 선생님들과 주 슈퍼바이저 교수님께서는 가장 경험이 없는 나의 새파란 질문들에도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 주셨다. 나의 노트는 무수한 메모들로 가득 채워졌다.



공사발이 끝난 후, 상담센터를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강남 한 복판에 있는 이곳에서 인턴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길을 열어줄까 설렜다. 온라인 사진으로 미리 둘러보았지만, 직접 방문해서 상담실마다 놓여 있는 테이블과 의자를 두 눈에 고이 담아보았다. 미래에 느낄 감격을 미리 훔쳐보았다. 이곳이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줄 곳이라 믿으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감일인 오늘 서류 접수를 하고, 아직 결과도 모르는 상태지만 이미 내 마음 안에서는 합격이 되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합격 연락이 올 거고 다음 주중에는 면접을 보러 다시금 강남역에 발을 디뎌야 할 것이다. 상상의 자유는 나를 가볍게 등 떠밀어 주었다. 자뻑은 금물이지만, 자뻑도 가끔은 필요하다. 나의 가능성을 믿고 나 스스로를 지지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자신감을 갖고 추진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내가 있고 싶은 곳에 나를 미리 데려다 놓음으로써 미래를 현실화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을 믿을 때 가능해진다. 단, 현실 감각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내일이 기말고사 성적 조회 시작일인데, 어제 발급받은 성적증명서에는 이미 기말 성적이 새겨져 있었다. 물론 자세한 점수는 내일이 되어야 확인 가능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만큼 올 A+을 받았다. 이 역시 작은 성취감이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생기가 돋아난다. 7월부터는 지도 교수님의 지도 아래 학우들과 논문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인생은 모호함으로 둘러싸인 세계지만, 나보다 앞선 이들에게서 나의 미래가 보인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나 혼자만 끙끙거리며 살지 않아도 돼서. 내 손을 붙잡아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더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엔 나의 뒤를 따를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어 줄 것이다. 이건 힘든 길이 맞다고, 지금 많이 힘들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거라고. 모호함으로 가득찬 인생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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