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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un 30. 2024

매직아이로 바라볼 것


매직 아이 바라볼 것



고등학교 때 어떤 아이가 신기한 책을 가져왔다.

그 아이는 그 책이 매직아이 책이라고 했다.

우리 반 모두는 머리를 맞대고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분홍 파랑 주황 검정 하양 빨강 초록 수많은

점들이 땡굴땡굴 무질서하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만약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동그란 점들을 지금 본다면

환공포증 때문에 팔뚝에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그때에는 환공포증도 없었고

분홍 파랑 주황 검정 하양 빨강 초록 수많은

점들 속에 신비한 세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 반 모두는 한 명씩 돌아가며 그 점들을 뚫어져라

째려보았고 어떤 아이는 이미지를, 어떤 아이는 그저

점들만을 보고야 말았다.

그 책을 가져온 아이가 주는 힌트를 받아먹은 아이만

점들이 맺어놓은 이미지를 볼 수가 있었다.

나도 운이 좋은 아이에 속해서

두 눈을 사팔띠기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나는 매직아이를 잘하는 아이들 속에 속했다.

무려 3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매직아이 책이 없는데도

내 두 눈은 여전히 매직아이를 잘하고 있었다.

어느 날 키보드를 응시하며 멍을 때리던 중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키보드가

갑자기 입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두 눈깔의 시선이 교차했고 교차된 시선은 뚜렷한 입체물을

만들어 내는 데 단박에 성공하고 있었다.

31년 전의 친구가 떠올랐다. 매직아이 책이 없어도 되다니.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는 잠에서 깬 어느 날 아침

엎드려서 베갯잇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순백의 베갯잇 문양

갑자기 입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두 눈깔의 시선이 교차했고 교차된 시선은 뚜렷한 입체물을

만들어 내는 데 또다시 성공하고 있었다.

키보드가 떠올랐다. 키보드가 아니어도 된다니.


나는 매직아이가 책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의 사물을 가지고도 내 눈을 사팔로 뜨고 바라본다면

그 대상은 매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의 신비와 경이로움은 내 두 눈깔의 교차와 맞바꾸는 순간

전기를 찌릿거리며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뇌 안의 수많은 전구가 영롱하게 반짝거렸고 그 순간

모든 감각이 정지되었다. 두 눈깔만이 살아있고

내 몸은 마비되었다.

몸은 마비되었지만 그 기분이란 황홀한 것이었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황홀함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매직아이를 처음 성공했을 때만큼의 황홀함이었다.

만약 그 친구가 매직아이 책을 학교에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느낄 수 없는, 정녕 알 수 없는 그런 황홀함을

매직아이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수가 없을 그 황홀함을

나 혼자 경각의 기쁨을 만끽하며 보낸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나는 세상도 매직아이로 바라보길 희망한다.

맨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한낱 단순한 점들과 선들에 지나지 않지만

두 눈깔을 교차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순간적인 환상이며 기쁨이다. 물론 환상이란 오래 지속될 힘이 부족한 게 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더 자주 눈깔을 교차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선으로만은 환상을 만날 수 없다. 적어도 두 개의 시선으로라야, 이 복잡한 세상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법이다.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의 이치가 다르게 깨달아진다.

하나의 시선을 고집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세상을 평면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세상 그 이 면에 조각되어 있는 아름다운 결정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매직아이로 세상을 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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