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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ul 07. 2024

영화 <팬텀 스레드>

부분에서 전체로 통합해 나가는 인생의 여정을 다루다


<팬텀 스레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만든 2018년도 미국 영화다. 예전에 봤던 <콘크리트 유토피아> 감독처럼 앤더슨 감독의 이 작품도 인간 내면의 불완전성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내면의 밑바닥까지 섬세하게 뒤집어 보여준다. 잔잔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가르던 선박이 거센 파도를 만나 모래사장에 머리를 쑤셔박박게 되듯이.



레이놀즈 우드콕


1950년대 런던 왕실과 사교계의 드레스를 만드는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이자 완벽주의자. 모든 일에 빈틈이 없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옷을 디자인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일을 할 때는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기한 내에 정확하게, 가장 품위 있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가장 가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 우연히 들어온, 그러나 레이놀즈 자신이 선택한 운명의 여인 웨이트리스 알마. 알마에게는 레이놀즈의 아름다운 의상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육체와 당당함이 있었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정부(情婦)로 대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었고 알마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화되는 특별 대우를 받는 것에 만족했다.



알마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알마의 인내심이 벽에 부딪히고 만다. 어느 작은 식당의 웨이트리스였지만, 지금의 사회적 위치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고 레이놀즈의 누이인 시릴에게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레이놀즈는 자신의 전부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와사삭 하고 식빵을 깨물었을 뿐인데, 나이프로 그 식빵을 쪼개느라 접시를 부닥치는 소리를 냈을 뿐인데,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기 일을 방해했다고 화를 내는 남자라니. 그런 남자를 애타게 바라보고 기다려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애꿎다. 알마는 자신의 전부를 이 남자가 사랑해 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일을 벌여본다. 깜짝 세리머니. 일하는 모든 사람과 그의 누이까지 밖으로 내보내고 그를 놀래켜 줄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산책을 마치고 들어온 레이놀즈는 집안의 차가운 공기를 직감하며 누이 시릴의 존재부터 찾는다. 그에게는 애착과 그리움의 대상인 돌아가신 어머니가 곧 누이인 시릴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의 내부대상(외부대상이 안으로 들어와 정신적 이미지로 내 속에 남는 것, 즉 대상에 대한 정신적 표상, 이미지, 환상, 대상에 대한 느낌, 기억이다)으로서 자기를 보호하고 위로해 준다. 그러나 현실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환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대신 그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할 외부대상(자의 주변에 존재하는 실제 사람이나 사물)이 있다. 바로 누이인 시릴이다. 힘들 때마 누이를 찾고 누이는 늘 그의 편이 되어 준다. 알마도 알고 있다. 그러나 시릴이 레이놀즈의 자기대상(자신의 심리적 구조의 기능을 대신 충족해 주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알마는 불편하다. 온전한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 누이를 찾고 있는 그에게 알마 자기의 방식대로 만든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들이밀었을 때, 레이놀즈는 그녀의 질문에 맛있다고 한다. 여자의 미친 직감은 무죄라고 했던가. 알마는 대번에 그의 말에 진심이 없음을 간파하고, 둘의 대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알마는 사랑하는 남자의 입을 통해, 니가 왔던 그 추한 곳으로 돌아가라는 악을 듣게 되고, 독버섯을 갈아 그의 차(tea)에 집어넣는다.



내 안에 너가 있어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강해지려고 노력하고, 많이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더 고차원의 단계는 많이 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약한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가질 수 없는 능력이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 권경인, <관계의 힘을 키우는 부모 심리 수업>, p.156-157


알마는 그에게 신체적 조건이나 부분적인 사랑으로써만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입에 독을 탄 차를 집어넣었다.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극단의 처방이었다. 나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그녀의 방법은 알맞게 먹혀 들어갔고 결국 그의 남자 레이놀즈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만다. 죽음의 냄새를 코끝으로 맡게 되는 순간 앞까지 갔다 온 레이놀즈는 결국 그녀의 보살핌에 의지하게 되고 그녀의 절대적이고 사악한 사랑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알마가 그녀 자신의 방법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독을 타서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소유하려고 한 것을 비난하고 말고 할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나는 단지 여기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완벽하고자 하는 사람도 실은 내면의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서, 그 모든 연약한 과정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자꾸 완벽하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누구나 연약한 존재다. 내면이 강철 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연약함을 당당히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진정한 위너(winn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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