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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ul 14. 2024

나는 노예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아포리즘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면



사회는 자신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불행이나 고독을 느낀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을 떠올릴 때마다 죄를 짓는 것처럼 불안해하는 것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현대인의 초조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미국인은 유럽인들이 모두 조용한 정서를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는 상상에 빠지곤 하는데, 실제로는 유럽인 대부분이 꿀벌이나 말벌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이같은 소란으로 발전한 문화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들이 이룩한 문명은 마치 계절의 변화를 잘못 판단해 너무 일찍 허물을 벗어던진 애벌레와 같다.

우리의 문명은 새로운 야만에 이르렀다. 현대처럼 활동가가 문명을 장악한 적은 없었다. 고요한 침묵은 이제 인류가 거쳐야 할 필연적인 교육 중 하나가 되었다.

활동가는 보다 높은 수준의 활동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좀 더 높은 수준의 활동이란 개성적인 활동을 뜻한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로서 활동하며 많은 장르를 개척했지만, 특정한 덕목을 갖춘 개인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비춰볼 때, 한마디로 그들은 나태하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 정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ㅡ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p.59~60 /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김욱 편역 / 포레스트북스



극단적인 두 개의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구분된다. 내가 만약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고 있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나는 노예이다."



나는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인간의 군상이 얼마나 다양한데 어찌 단순하게 인간 유형을 둘로 나눌 수 있느냐고 논리적인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자존감을 낮출뿐더러 부정적인 사고와 인지적 오류(cognitive error)를 야기할 뿐이라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이 말에 생각이 깊어졌다. 노예냐 자유인이냐. 나는 얼마나 노예로 살고 있고 얼마는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가. 나의 가족들은 얼마나 노예이고 얼마는 자유인이며,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노예이고 얼마는 자유인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전 문명인들이 일구어 놓은 이기(利器)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좀 더 일찍 태어나지 않아서, 좀 더 나중에 태어나지 않아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지금이 딱 좋은 시대라고. 골디락스 조건처럼 어쩌면 이렇게 딱 알맞은 시대에 운명처럼 태어난 것이냐고 하늘에 감사하고 땅의 축복에 무릎 꿇었다. 나라는 작은 인간, 이 세상에 태어나 아직 100만 원어치라도 기여한 것 없지마는, 이 세상으로부터는 수천만 원어치의 기름과 향유와 문물과 자연을 선물 받았노라고, 죽기 전에 몇 천만 원 정도는 환원해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곤 하였다. 그 정도면 나라는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그리고 니체가 말하는 '특정 덕목을 갖춘 개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는 개인이라면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냐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하루종일 종종거리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새로운 목표를 지어놓고, 새로운 시간표를 작성하면서, 지금 내가 할 일과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나의 손발을 바라본다. 2주의 시간이 있으니 그 안에 집중 연습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두 달의 여유가 있으니 그 안에 눈에 불을 켜면 합격할 수 있겠지, 그런데 다른 일정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 내가 펼쳐 놓은 그물 안으로 은빛 물고기들을 수확할 날들을 기다리며 나는 초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초조와 불안과 한 패가 되어 나는 누구와 겨루고 있는 것이냐. 나는 하루의 3분의 2를 나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었다.



수입은 줄어들고 지출은 늘어났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가계의 모든 지출을 감당하고 내가 버는 수입으로는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의 교육비가 올라가고 나의 대학원비와 취미생활 피아노 원비에다 물가상승비까지 충당하려니 대출금을 갚을 수가 없다. 수입은 줄어들어도 양가에 드리는 용돈은 줄일 수 없고, 교육비도 줄일 수 없고, 보험료도 줄일 수 없고, 나의 피아노 원비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지갑의 목을 졸라매어 두 달 연속으로 식비와 여가비를 토탈 100만 원씩 줄이는 기염을 토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안 될 것은 없었다. 전보다 조금, 아주 조금 헐벗고 굶주리면 되었다. 나는 나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노예와 다름없었다. 나는 초조와 불안의 노예로 살고 있었다.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고 싶었으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언제까지나 풍요로울 것처럼 착각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간은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도 사소한 불안을 느끼는 법이지만, 현실 생활의 안락함이 요동칠 때는 급격한 불안을 느다. 그리고 더 큰 요동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게만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우리 인간은 늘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그러면서 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감정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감정의 기복에 휩쓸리며 감정의 밀물과 썰물을 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파도타기도 하면서 가끔은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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