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아마 남편이 만든 음식 얘기를 했을 거예요. 설 명절을 앞두고 남편이 LA갈비 재료를 사왔고 핏물을 뺐고 양념을 만들었고 거기에 배랑 키위가 들어갔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요.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면서 맛있다고 말해 주었죠. 그다음에 또 다른 얘기도 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심리도식치료 이야기를 꺼냈죠. 바로 여기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심리도식치료> 책이 너무 흥미롭고 재밌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이건 지난 학기에 어떤 슈퍼바이저 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인데, 심리도식이라는 게 18가지나 된다고 했지요. 그리 거창하게 설명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근데 갑자기 남편이 소파에 앉아있던 작은 아들한테 말을 겁니다. 배가 맛있다면서 배를 먹었냐, 안 먹었냐,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저는 저 말이 금방 끝날 것인지 아니면 더 이어질 것인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어허라. 남편이 거기다 살을 붙이고 있네요. 말이 길어지고 있었지요. 저는 남편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남편이 레이더에 걸린 듯 시선을 돌리다 두어 번 제 눈동자를 마주 봅니다. 0.5초 정도의 찰나. 그러곤 묻습니다. 왜?
왜냐고? 몰라서 묻는 거니?
자기야, 지금 나는 심리도식 얘기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과일 얘기를 하고 있네?
어,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뭐?
나는 얘기가 끝난 줄 알고.
헐. 또 시작입니다.
그놈의 회피.
저는 말했습니다.
자기는 내 말을 자꾸 뚝뚝 끊더라. 어젯밤에도 했던 얘긴데? 별로 안 듣고 싶은 얘기면은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불쑥 딴 얘기 꺼낸다고.
남편은 대답합니다.
난 정말 다 얘기한 건 줄 알았어. 끊은 게 아니라.
근데 왜 나는 얘기가 끊긴 느낌을 받는 걸까? 최근에 공부한 게 좀 재밌어서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자기는 그냥 도입부터 무 자르듯 뚝 자르고 말이야. 싫으면 차라리 싫다고 말을 하지.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더 얘기해 봐.
이러면 더 얘기하고 싶겠어? 벽에다 대고 하느니, 안 하는 게 낫지. 근데 말이야. 자기가 정치 얘기를 꺼내면, 내가 또 그놈의 정치 얘기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도 내가 심리 얘기 꺼내면 아, 또 그놈의 심리치료 얘기 시작이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니, 어.. 그러니까 심리 그런 쪽은 내가 모르는 얘기고 학술적인 내용이니까 그다지 관심 있게 듣게 되지 않는 거지. 아예 안 듣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점점 그런 얘기가 많아지면 다 그게 그거 같아서 비슷비슷하게 들리고.. 뭐..
음.. 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라도 꺼내서 편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자기가 정치판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핏대 세우면 듣기가 싫어지고, 자기는 내가 심리 얘기를 하면 별로고 그러네.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듣기가 힘든 상황이네.
아니야. 나는 그런 건 아니라니까?
자기는 웬만하면 다 맞춰주려구 하는 거지만, 그래도 상대방 취향은 고려해 가면서 대화하는 게 난 좋다고 생각해. 무조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듣기 싫어하는 얘기는 좀 덜 하는 방향으루. 그래야 서로 기분 좋고 잘 통한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좀 많아? 대화가 잘 통해야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난 그래서 자기 생각을 알고 싶은 거야.
불편한 주제가 있는데도 억지로 참고 들으면 엄청나게 역효과 날 거야. 상대방 생각을 모르면 계속 얘기하게 되니까. 계속 우물에 물 붓는 거지. 그럼 그 물이 차고 넘치게 되고. 직접적으로 말 안 한다고 못 느끼는 건 아니거든? 일단 자기처럼 화제를 돌렸다면, 이미 관심이 없다 정도는 알 수 있지. 근데 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래. 그러면 난 불편해져. 어떤 게 맞는 건지 헷갈리니까. 그니까 자기 생각을 그때그때 솔직히 얘기해 줬음 좋겠어.
그래. 그럼 얘기하다가 불편한 점 있으면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얘기를 하고 넘어가는 걸로 해볼게.
넘치게 하지 말자. 주워 담기 힘들어져.
어. 그래그래. 알았어. 이제 운동 갔다 와도 되지?
그래, 잘 갔다 와.
여러분들의 대화는 어떠신가요? 정말 궁금하네요. 다른 부부들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저희는 대화가 통하게 된 지가 한 3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완벽한 벽이었다고 느껴요. 남편은 너무나 무응답이었고, 무반응이었어요. 자기 생각도 말하지 않았죠.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인 것처럼요. 저는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애들 키우는 얘기, 밖에서 있었던 얘기, 양가 부모님 가족들 얘기, 뭐 이 얘기만 해도 할 얘기는 많겠죠? 하지만 저는 이런 얘기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얘기하는 게 너무 중요하거든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난데, 내 얘기는 빼고 딴 얘기만 한다? 앙꼬 없는 찐빵이죠.
근데 남편은 굳이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죠. 사실 자기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할 얘기도 없을 수밖에. 남편은 30대 후반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정치에 대한 자기 생각은 폭발적으로 피력하고 있어요. 최근엔 그 수위가 너무 과도해져서, 제가 정치 얘기는 그만해달라고 요청했구요. 그건 좀 미안하죠. 본인의 유일한 관심사 얘기를 제가 봉쇄해 버렸으니.. 저 또한 내 관심사를 상대방 취향을 모르는 상태로 막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순간적으로 눈치를 보게 된 건가 봐요.
그래요. 좋게 말하면 남편을 존중하고 싶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를 보았던 거죠. 그러네요. 글을 쓰다 보니 알겠어요. 하지만 부부간에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저는 대화가 통하는 부부로 살고 싶고, 그러려면 상대방 생각이나 취향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말을 꺼낸 덕분에, 서로 불편한 것도 얘기할 수 있고, 조정할 수도 있게 됐죠. 소통이 엄청나게 잘 되는 부부라면 뜨거운 감자도 잘 다룰 줄 알겠지만, 저희는 이제 고작 소통 3년 차 부부라서요. 같이 산 걸로는 20주년이 넘었지만, 소통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소통이 어려운 부부님들, 늦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Here we go~~^^ 인생이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