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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준의 사랑

유퀴즈 구준엽

by 김혜정

<유퀴즈>에 엽준이 나왔다. 아마도 구준엽의 애칭으로 붙인 듯한 이름 엽준, 말장난이 귀엽다. 초중반부터 본 것 같다. 스토리의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었으니까. 엽준은 20년 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구준엽이 결혼을 했었나, 안 했었나. 20년 전에 했던 결혼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건가? 아니면 혼자 20년 간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는 얘긴가. 알쏭달쏭했다.

알고 보니 20년 전 대만의 방송에서 만난 대만 사람 ‘희원’이라는 방송인과 너무 사랑했지만 방송일을 둘러싼 여건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도 서로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다고. 그렇게 아린 사랑을 가슴에 묻고 20년을 보내는 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고 잘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뉴스로만 확인한 준엽. 자기와의 사랑은 하나의 점으로 남기고 인생의 수순을 밟으며 다른 남자를 찾아 새로운 점을 찍은 사람이지만 준엽은 그녀에게 어떤 원망도 미움도 없는 듯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날아든 그녀의 갑작스런 이혼 소식, 그는 다시 원점을 돌아보게 된다.


20년이라는 세월은 강산을 두 번이나 바꿀 기나긴 시간이자 굴곡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 시간은 한낱 숫자에 불과했다. 그들은 시간의 초월자였고 그리움의 긴 터널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 난 오솔길에 들어서서 그들이 20년 전에 꿈꾸었던 길을 비로소 걸어가려고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희원’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보여주려는 몸부림은 구준엽이라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사랑의 그 본질을 잠시나마 음미해 보게 했다. <50대를 위한 마중물>이라는 내 매거진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지 고민스러웠었다. 사랑이라는 이 지극히 보편적인 진리를 어떤 식으로 써야 진정성이 있을까 속으로 속으로 침전해만 가고 있었는데 구준엽이라는 사람이 ‘사랑이란 참을 수 없는 재채기처럼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몸짓’이라는 걸 넌지시 일깨워 주었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지고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그런 감정의 발로가 사랑이라는 걸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그걸 잊고 살고 있었던 일까.

우리도 사랑에 몸부림칠 때가 있었고 사랑에 갈증이 나서 벌컥벌컥 사랑을 들이키고 싶을 때가 있었잖은가. 눈맞춤에 쑥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하고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에 들고 있던 숟가락도 덜그럭거리며 민망해하던 순간들, 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쇼윈도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고 사랑을 만나서는 그 사랑과 내가 어울리는지 다시금 둘의 모습을 비추어 보던 순간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깍지만 끼고 있어도 가슴이 쿵쾅거리던 그런 무지개같은 순간들이 어째서 이토록 회색빛이 되고 까맣게 타들어가고 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

아아, 너무 청초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구준엽의 피어나는 눈꽃이, 손가락에 아로새겨진 실반지가, 어깨밑에 뜨겁게 파들어간 희원의 별자리가, 희원의 넘치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려면 시간이 없다는 그의 언어가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리니, 그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지금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는 20~30대의 연인들도 이와 같을까. 이렇게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와 같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진실로 진실로 묻는다.


사랑은 그의 말대로 재는 것이 아니다. 니가 더? 내가 더? 누가 더 사랑하는지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밀당? 그건 자석에게나 맡겨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밀당의 고수가 아니다. 그저 하염없이 퍼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라나는 새싹처럼 계속 자라나고 끊임없이 새끼를 쳐서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성근 듯 보이지만 안으로는 빽빽한 숲이 되어 서로의 가지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면 그 울창함 속에서 편안하고 시원한 공기 속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다. 깊은 사랑은 갈수록 진중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정녕 사랑이다.

자식들에게만 사랑을 죄다 퍼주어서는 안 된다. 자식들에게만 퍼주고 남은 찌끄레기같은 사랑을 배우자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평생의 내 반려자가 될 사람을 다시 사랑하자. 사랑은 또다시 피어난다. 구준엽의 사랑 DNA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도 갖고 있었다는 걸 잊었는가?슬픈 일이지만 살면서 의도치 않게 서로 부딪히고 침식되어 감정이 메말라가고 서운함과 불만이 퇴적되어 화산처럼 폭발하다 보니 어느새 재가 되어 있는 사랑을 발견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먼저 주려고 하기보다는 받길 더 원한다. 이 얼마나 지극히 이기적인 마인드인가. 사랑은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처럼, 어린 우리 자녀들의 넘치는 사랑처럼, 우리가 받은 모든 사랑의 이름처럼 뱃속부터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 마음속에는 주고 싶은 사랑이 가득 차올라 있다. 그러니 이제는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의 몸짓, 하나의 손짓, 하나의 눈짓이 되어 사랑으로 태어나야 한다. 영롱한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고 세상의 걱정근심이 사라지게 해 줄 것이다. 멀리 있는 아프리카 기아들을 위해 눈물 뿌리며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나의 반려자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자식과 어떤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기 전에 나의 반려자와 어떤 시간을 보낼까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사랑, 그 이름을 불러보리라. 20대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 가슴 뛰는 사랑으로 내 가슴을 채우리라. 내년에 40이 된다는 구준엽의 절절한 사랑이 내 마음에도 물들어 온다. 사랑은 전파되는 거다. 영화 같은, 하늘이 갈라놓았다가 다시 이어준 인연 같은, 그런 운명 같은 사랑은 비록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기에 내 심장아, 다시 한번 나대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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