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져도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 맨얼굴을 부비며 목놓아 울지 않으리라
“등록금을 대줄 형편이 안 되니 대학은 가지 마라.”
고3 수험생 딸의 귀에 청천벽력으로 울려 퍼지는 아빠의 목소리.
“왜? 오빠는 대학 갔잖아. 나는 왜 안 돼!”
“오빠 등록금 대기도 힘들어. 너는 못 대준다.”
독불장군 같은 아빠의 기선제압에 입은 앙다물어지고 왠지 모를 억울함과 분노의 광기가 온몸에 서려 나는 등록금 지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스스로 독립하면 된다고, 어서 자립해서 이 집을 나가자고 속으로 억만 번을 되뇌었다.
가난이 죄라면 죄였을까? 아니, 가난이 죄가 아니라 넌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는 아빠의 서슬 퍼런 옹고집이 죄라면 죄였다. 등록금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아니었는데, 그냥 당연히 대학은 입학하는 거였는데 아빠는 오빠의 학비조차 대기 힘든 형편에 굳이 딸자식의 장래까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심산이었다. 입학이고 뭐고 딸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아빠는 자주 사용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우리 집엔 왜 그리 유교의식이 팽배했는지……. 어차피 출가외인 될 몸, 나는 어서 빨리 출가외인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대학 졸업장이 필요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진짜 독립’을 이루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압제도 간섭도 잔소리도 이제는 해방이었다. 대학 캠퍼스와 고시원은 나의 정원이자 안식처였고 줄줄이 잡히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독립된 나의 근로소득의 원천이었다. 그렇게 독립은 나의 경제적 자립에 이어 오히려 부모님 가정에도 보탬이 되어 드렸다. 각종 생필품은 떨어지기 무섭게 사다 놓았고 먹을 식재료, 아빠의 치과 치료비, 부모님 보험 등 내가 효녀구나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잘했다. 그때부터 나는 비로소 부모님의 딸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20대에 빨리 출가외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권위의식 절대 없고 내 마음대로 살게 해주는 사람!! 이것이 내 신랑감의 조건이었다. 그런 내 소원을 신께서 알고 계셨는지 진짜 그런 사람을 만났고 한결같은 그런 사람과 17년째 사는 중이다. 그런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부러워하는 분이 계신다. 바로 우리 엄마다. 사실 이 글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엄마는 결혼 이후 나처럼 자유롭게 살지를 못하셨다. 참고 또 인내하며 세상을 버텨나가셨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도시로 와서 살 수 있다는 기쁨에 아빠와 일면식을 한 후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시집에 들어와 보니 홀아비 되신 아버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알고 보니 청각언어장애인 - 우리는 일명 벙어리라고 칭했다 -이셨던 것이다. 홀아비 되신 아버님(나의 할아버지)은 어찌나 성질이 고약한지 밥상 뒤엎기를 밥 먹듯 하고 뭐가 마음에 안 들면 애애애~ 하며 고함을 치셨다. 수화도 직접 만든 몇 가지 안 되는 동작만으로 하니 의사소통이 가능할 리 없었고 무서움과 서러움에 진저리 치는 고통의 세월을 견디었다. 견디다 못하면 집을 박차고 나가기가 일쑤였고 가출한 엄마를 수소문해서 찾아다녔던 적도 허다했다. 어느 날은 자개장에서 엄마의 옷가지 사이에 놓인 약병을 발견했다. 엄마를 쫓아가 물었다. 이게 뭐냐고. 엄마는 콱 죽어버리려고 사놓은 거라고, 다시 갖다 놓으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과 슬픔이 복받쳐 울면서 얼른 앞집 아주머니를 불러왔다. 늘 친하게 지냈던 앞집 아주머니가 “애 앞에서 그러면 못 쓰지~!!” 하면서 악병을 갖고 엄마랑 실랑이를 했다. “내가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하는 설움 섞인 엄마의 넋두리를 아직도 내 몸은 쓰라림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가 내 나이 일곱 살이었던가.
세월이 흘러 내가 중1때 벙어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엄마의 사랑 한 번 받아본 적 없이 벙어리 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살아온 우리 아빠는 독불장군이 되어 갔고 자존심만 더 굳건해져 갔다. 권위적인 벙어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권위주의로 아빠는 ‘내 말에 복종해!!’를 가훈으로 삼을 듯 외쳐 대셨고 그렇게 우리 집안은 유교 질서가 엄격한 분위기로 재무장되었다. 그렇게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무섭고 폭발할 듯 전쟁 같은 살얼음판 위에서 지나갔다. 그 후 20대가 되면서 난 자유인이 되었고 지금껏 자유부인으로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두 분 다 애처롭고 애달프다.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 업어 키우고 농사만 짓다 큰 꿈 품고 이촌향도 했다가 16년을 가혹한 시집살이에 허덕이고 이제 편하겠거니 하는 사이 남편의 반동 심리에 더 기댈 곳 없어져서 자식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했던 우리 엄마나, 부모의 진실된 사랑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어서 어떤 마음이 사랑인 건지 60대 갱년기에 들어서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게 사랑인 건가 모르겠다며 떨리는 손으로 딸에게 전화하던 우리 아빠나, 힘들고 외롭게 지낸 지난날들이 추억이 되었을까, 한이 되었을까.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면서 멈출 수 없고 감출 수도 없을 만큼 하염없이 큰 사랑을 알게 되면서, 우리 부모님이 과거에는 나를 옥죄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나를 사랑하며 키우셨을까 생각하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그래서 언젠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날이 오더라도 후회 없이 잘해드렸다고, 난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애써 바라 본다.
부모님은 아무런 밑천도 지식도 삶의 여유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오셨다. 지금도 어쩌면 힘겨운 걸음을 걷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그분들의 삶을 대신해 줄 수 없음에 안타깝고 그렇게 버텨온 세월이 야속하고 애석하다. 딸이 바쁘고 힘든 거 아시기에 이제는 어떤 잔소리도 간섭도 압제도 없이 그저 언제 얼굴 볼 수 있을지 날짜만 세고 계신 우리 부모님, 더 늙으시기 전에 더 많이 안아드리고 손잡아 드리리라고 다짐한다. 그날이 오더라도 울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