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와 내 첫사랑

<나의 해방 일지>를 보다가

by 김혜정
(염미정) 난 한 번도 안 해 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우리 하기로 한 건가?


(구씨) 했잖아. 아까 낮에.





맞아. 아까 낮에 했었지. 내가 너랑 이제 추앙하는 사이가 되겠다는 몸짓. 그 싸인.

100미터를 11초 플랫(flat)으로 뛰어야만 건널 수 있었던 논두렁 밭을 도움닫기로 힘차게 뛰어 결단코 미정의 햇빛가리개 모자를 가져오고야 말았던 구씨의 그 싸인. 그 몸짓. 그 상징.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작품에 손석구가 나온다는 걸 안 시점이 영화 <범죄도시 2>를 보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범죄도시 2>는 강해상 연기밖에 볼 게 없었는데 강해상 캐릭터를 너무 훌륭히 소화해 내고 사석에서는 수줍어하는 손석구가 너무 귀여워 보였다. ‘추앙해요’로 추앙받은 배우 손석구를 아껴 보고 싶어 아끼고 아끼다가 오늘에서야 8화까지 보고야 말았다.



지금 마음으로는 딱 요기까지만 보고 싶다. 한쪽 팔을 건들거리며 터벅터벅 걷는 그 걸음걸이와 먼 산을 응시하는 듬직하고 넓은 어깨, 말없이 고요히 검은 산의 어둠까지 삼켜낼 것 같은 포스와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부드러운 날갯짓까지. 그냥 너무 좋다.



어떻게 하려고 밤마다 마신 술병을 방 한가득 초록으로 눈이 부시게 쌓아 놓았는지, 혹 잊을 수 없는 기억을 투명하게 되살리기 위한 의식은 아니었는지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지만 그녀를 추앙하기로 마음먹자마자 술까지도 담대히 끊은 그 남자. 하루 종일 머릿속으로 욕밖에 안 하던 그 남자가 이제는 하루를 기다림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이야기부터는 얽히고설키는 인물 관계와 구씨의 본질적인 면, 폭력과 갈등이 난무하게 될 것 같다. <나의 아저씨> 때와는 다른 이유로 시청을 중단하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그러나 작가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때처럼 난 기어이 끝까지 보고 말리라.)




어젯밤 구씨를 화면으로 보다 잠들었다. 꿈에서 만난 것 같지는 않지만 드라마의 여운은 꿈속에서도 이어졌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안마기에 몸을 싣고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여운 속에서 헤맸던 것을 보면 말이다.



드라마는 그렇다. 특히 이런 사랑과 감성이 머리부터 심장까지를 훑고 지나가는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 시청이 끝날 때까지 여운이 지속된다. 아니, 여운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 여운이 사라지거나 깨질까 봐 조심스럽고 아무리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그들의 삶에 내 삶을 투영시켰던 그 시간에 흠집이 날까 서럽다.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랑과 감성에 내 이성이 사족을 못 쓰니까.



나는 언제 추앙을 받았던가.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냥 나 자체를 사랑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내가 추앙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눈을 감고 과거로 과거로 간다. 이건 생각보다는 자주 있는 일이다. 얼마 전 꿈에 내 첫사랑이 나왔다. 첫사랑을 꿈에서 만난 게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마기에 누워서 오래도록 첫사랑을 그렸다. 스무 살에 만났던 내 첫사랑. 멀리서만 봐도 너무 설레서 그가 서있는 앞에까지 걸어가는 것도 무지 오래 걸렸던, 키가 183이나 돼서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말수는 적었지만 마음이 깊어서 내 얕은 마음이 금방 들통나고야 말았던, 그랬던 내 사랑. 드라마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헤어졌지만 그래서 더 지금까지도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있는 사랑.



구씨를 보니 첫사랑이 생각났다. 내 첫사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았다. 나와 동갑이었는데도 인생을 두 번 산 것 같은 어른 같았다. 그가 내뱉는 말을 나는 5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가 책을 많이 읽었던 이유였고 그만큼 사유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 당시 별로 읽은 책이 없었으므로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가 던지는 말은 시였고 메타포였고 가끔은 연주 같았지만 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그가 어려운 얘길 하면 나는 가끔 엉뚱한 질문을 했으나 그는 대답하다가도 멈추는 때가 있었고 그러면 나는 너무 무안해져서 “너 나 무시하냐?”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면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머릴 쓰다듬어 주었고 난 그렇게 안아주면 금세 포근해지곤 했다. 큰 키만큼 큰 손, 그 큰 손에 폭 들어가고도 남는 내 손은 키 큰 단풍나무에 매달린 단풍잎과 같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하염없이 좋았다. 발걸음이 맞지 않아서 “야, 내가 너한테 맞출 수는 없으니까 너가 나한테 맞춰!!”하고 아양을 떨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손만 꼭 쥐어줄 뿐이었다. 수많은 밤에 얼마나 많은 길을 함께 걸었던가. 아무 말 없이 걸으면서도 내 심장은 터져 나갈 듯 했다.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구나를 처음 느꼈다.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그 사람이어서 좋았다. 가슴이 사랑으로 꽉 채워졌다. 이게 바로 추앙이었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앞으로도 매년 나이를 먹을 예정이지만 첫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을 예정이다.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도 변질되지 않을 것이고 스무 살 그때의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난 구씨를 여기까지만 보고 싶다. (또 보고 싶어서 끝까지 가슴 졸이며 볼 테지만.) 그냥 스무 살 때처럼, 언제나 듬직한 산 같고 깊은 바다 같고 보고 있어도 자꾸만 더 보고 싶은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서, 그 모습이 너무 구씨와 닮아 있어서.



지난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건 건설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현재에 집중하라고 그는 날 꾸중할지 모르지만, 설레는 과거에 오히려 가끔씩은 얽매여도 좋다. 이렇게 모처럼 시원한 늦가을 아침에 뜨끈한 안마를 받으며 널 생각하고 있다는 건 비밀이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처음 써 본 리뷰 ㅡ 알라딘 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