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편견을 버리다

by 김혜정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중1 때였던가, 외삼촌 댁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 외삼촌에게는 아들과 딸이 1명씩 있는데 나보다 1살, 3살이 어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린 - 그 이후로는 연락 없이 지내는 - 남자 사촌 동생 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상실의 시대》를 보았다. 외삼촌 댁에는 그 시절 가라오케가 있어서 친척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마이크를 붙잡고 <J에게> 불렀던 직후였기에, 가벼운 내 노래에 대비된 그 두꺼운 책은 그 무게감만으로도 나를 가볍게 무시하는 듯했다.


"너 이거 읽었어?”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촌 동생은 “읽고 싶으면 가져가도 돼.”라고 했다.


“그래!!” 하고 자신 있게 그 책을 주워 담아 왔으나 나는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이걸 다 읽었다고? 그럴 수 없어. 이건 내가 읽기에도 너무 어려운데 한 살씩이나 어린 놈이 이걸 이해했다니.


그 이후로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쓸데없이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아서, 경쟁하기 싫은 한 살 터울의 사촌 동생보다 못한 이해력을 가졌다는 걸 인정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래서 덮어놓고 싫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책은 동댕이쳐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일산의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내 고정관념을 깨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어떤 책을 찾던 중 발견한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주 짧은 단편 수필집이었다.


99페이지 짜리 손바닥만 한 책이라니!! 너무 신선했다. 그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읽어보니 복잡하고 뜬 구름 같은 이야기가 아닌, 명징하고 속 시원한 자기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였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서술해 놓은 책이었다. 그 작은 책 한 권으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파편들을 추억하고 회상하고 성찰하는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대단한 걸작을 탄생시킨 세기의 작가일 뿐.



작품 속으로~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교육 시스템은 너무도 획일적이며 억압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내게 만성적인 불만을 품게 되었고, 나는 만성적인 고통(무의식적인 분노를 포함한 고통이다)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아버지는 무척 기뻐한 듯하지만, 그 시점에 우리 부자 관계는 이미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나는 지금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다, 기대를 저버렸다 하는 기분을 – 또는 그 잔재 같은 것을 – 품고 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넘어서부터는 ‘사람은 각자 개성이란 게 있으니까, 뭐’ 하고 떨어 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십 대의 내게는 어느 모로나 그다지 마음 편한 환경이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막연한 가책 같은 것이 따라다녔다. 지금도 때로 학교에서 시험 치는 꿈을 꾼다. 나는 단 한 문제도 풀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재깍재깍 흘러간다. 그 시험에 떨어지면, 나는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도... 그런 꿈이다. 그러고는 대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뜬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책상에 들러붙어 주어진 과제를 하고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마작을 하거나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이 옳았다고, 지금은 확신을 갖고 단언할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ㅡ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p.61~62)



인용한 부분에 대한 소고



1.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가책을 느끼는 아들



요즘 부모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있다면, 자식은 부모의 대리만족의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가 낳았다고 해서 아이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건 일종의 오만이다. 부모가 잘났다고 해서 자기와 비슷한 수준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도 역시 무리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부모의 소원 - 국어 교사였던 부모처럼 교사가 되는 것 - 을 거부하면서 가책을 느꼈고 그것은 거대한 고통으로 남아 결국 아버지와의 소통 단절로 이어졌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화해 아닌 화해를 나누었다 했지만 아버지와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기엔 이미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시대가 변하고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의 씨앗은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이 잘 되길 염원하는데 그 잘 된다는 말을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부'로 여기는 부모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부터도 머리로는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며 행복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너의 진로로 이건 어때? 저건 어때?”하고 묻게 되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나 나나 뭐 거의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나의 경우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너무 억압해서 사이가 멀어지는 정도는 아닐 뿐.



2.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 각자 세대는 고유의 중력이 있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섭리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 세대엔 그 시대의 경향과 문화 혹은 시대적 가치관이 있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또 다른 그것이 있었다. 물론 시대를 넘나드는 보편성이라는 것도 있지만 세대만의 고유한 특징은 개개인의 개성만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지금 우리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가치관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건 마치 자율주행차나 가정용 로봇에 관한 매뉴얼을 책으로만 익힌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사용하지 마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어른이 되면 당연히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모가 살아온 과거를 바탕으로 자식들을 훈계하는 것이 오히려 자식의 앞날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 될지 모른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찌 미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으며 영화 속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는 것을 굳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식의 미래를 섣불리 재단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자유를, 특히 젊은 날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왕성한 호기심으로 자기 내면과 외부 세계를 자유롭게 탐색하며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모든 젊은이들은 누구든 자유를 갈망하며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도 쌍심지를 켜고 감시할 필요가 없다. 넘치는 자유가 방종이 될 수는 있으나 울타리에 가두기만 하면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해 왔고 인류도 망해가면서 발전해 왔다. 과거에만 얽매였거나 부모의 말(앞선 세대)에 순종하기만 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ㅡ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p.93)




3. 빗방울 하나, 그게 바로 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이 왜 유명한지 이제 알 것 같다. 보통 때, 보통의 사람이 때를 밀어서 각질을 벗기고 시원함을 느끼는 정도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읽을 때면 같은 때를 밀어도 피부의 각질이 아니라 뼛속에 있는 각질까지 벗겨내는 시원함이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 든다. 동시에 시원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필이면서도 소설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냥 단순하게 말해서 비유를 '참' 잘한다.


우리 각 개인은 빗물 한 방울과 같지만 수많은 빗방울 가운데 한 방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다른 한 방울로 치환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우연히 만나서 태어났을 뿐이지, 아버지의 정자가 다른 난자와 결합했다면 결코 수정되지 않았을, 그래서 우린 세상에 없었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태어났을 거라는 엄연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의 생명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태어난 이상 ‘나’라는 생명체 고유의 생각을 가지고 고유의 역사를 만들며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수정란으로 잉태된 한 방울의 인생이지만 이 한 방울은 환경에 따라 더 커질 수도 있고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방울과 또다른 방울들이 모이면 엄청나게 큰 방울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조직이 될 수 있으며 그 조직들이 연결되면 거대한 빗줄기가 어 인간의 땅을 듬뿍 적신다. 가끔은 홍수가 나게도 하고 가끔은 말라 버려 가뭄이 되게도 한다. 그건 신의 조화일 수도 있지만 한 방울의 의지로 태어난 기적일 수도 있다.



이 ‘빗물 한 방울’의 비유는 나도 예전에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 이 책을 만나기 전 내가 먼저 브런치에 썼어야 하는데!! 많이 아쉬운 일이다. 하하. 진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한 권을 읽은 건 어쩌면 나에겐 행운이다. 하나의 벽을 깼고 벽을 넘었으니까 말이다.


그 역시 이 세상 빗방울들 가운데 한 방울이었고 아버지에게는 성에 차지 않는 한 명의 아들이었으며 젊은 시절엔 방랑자이자 반항아였다. 숱한 고민과 좌절이 있었던 보통의 사람이 자신의 노력에, 앞선 작가들의 도움을 더해 위대한 작가로 거듭난 것이었다.


우리는 평범하면서도 조금은 위대해지기를 꿈꾸지만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걸 이 책을 읽고 다시금 깨닫는다.


《상실의 시대》도 읽고 《노르웨이의 숲》도 읽고 《1Q84》도 읽보려고 한다.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통의 인간으로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은 이제 새털처럼 가벼운 일이 될 것 같다. 그의 작품이 지루하든 말든 간에 가까운 사람이라 느끼는 순간, 지루함은 친근함으로 바뀌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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