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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좋아서

함박눈에 대한 단상

by 김혜정


눈이 펄펄 내린다.
새하얀 눈송이들이 시린 내 마음을 녹여 주려고 내 안으로 들어온다.
고드름같이 얼어붙었던 차가운 심장은 어느덧 따뜻한 온기로 데워지고
그 심장을 흐르는 뜨거운 피는 온몸을 녹여 주려고 힘차게 요동친다..


작은아들을 영어학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함박눈이 오기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눈이 자주 오지 않는다며 전력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외치던 작은아들에게 모처럼 반가운 선물이 내려온다. 왜 눈이 좋으냐고 내가 물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좋아서~”라고 한다. 그럼 눈싸움 같은 건 안 해도 괜찮은 거냐고 또 물었다. “눈싸움은 안 해도 되고 나는 눈 밟을 때 뽀드득거리는 느낌이 좋아~”라고 대답한다. 맞아. 엄마도 뽀드득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좋아. 옛날에 엄마가 너 만했던 때는 함박눈이 펑펑 와서 무릎까지 쌓인 적 많았거든. 시골 외할머니 댁 놀러 갔을 땐 와~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진짜 허벅지까지 푹푹 들어갈 정도였지. 하얀 눈밭이 장관이었는데……. 작은아들, “진짜 좋았겠다아~!!” 하며 감탄. 하얀 눈이 좋아서 겨울이 좋다는 작은아들은 사시장철 눈이 쌓여 있는 북극 지방에 가보는 것이 소망 중 하나란다. “근데 엄마는 눈이 싫어?” 아니, 엄마도 눈이 싫지는 않지. 예전에 내리던 눈이 아니라서 아쉬운 거지. 차에서 내린 작은아들은 잠시 황홀한 느낌으로 감격해하며 하이얀 눈을 맞아본다.


아들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십여 년 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안도현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이다. 그냥 ‘함박눈’하고 입력하니까 자동으로 자판기가 내뱉은 답지처럼 나와 버렸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도 동시에 생각났지만 백석의 시는 시대적 상황(일제 강점기) 해석이 필요하기에 여기서는 안도현의 시를 인용해 본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이 시의 주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것.


나에게 겨울은 손발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아 몸이 으스러지게 추운 혹한기였다. 우리 집은 동네 골목길 가운데서 유일한 2층 단독 주택이었지만 집안의 온도는 여느 집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안방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마냥 아궁이에서 데워진 온기가 닿는 곳은 남한, 안 닿는 곳은 북한이었다. 연탄을 연달아 세 장 때면 동남아, 시베리아도 됐다. 중1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차지가 된 제일 작은 방은 아랫목 윗목도 없이 그냥 방 전체가 썰렁했다. 아궁이와 가장 먼 거리에 지어진 방인지라 아무리 연탄을 빵빵 때도 샤프 잡고 글씨를 쓰던 곱아진 손을 녹여주진 못 했다. 영하 몇 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들이랑 놀든 누굴 마중 나가느라 걷든 밖에서 30분 정도만 있으면 콧속에 살얼음이 생겨 코로 숨을 쉬면 들숨에 눈의 결정이 더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촉각이 이렇게나 섬세하면서도 빡세게 느껴질 수 있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던 때였다. 콧속 사정에 만만치 않게 얼굴도 바람의 혹독함에 대환영 파티를 열어 주었는데 한랭 전선의 냉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면 35년 전으로 돌아가거나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해 보면 될 것이다. 두 뺨과 두 귓덩이, 줄줄 콧물이 새어나가던 코가 칼날에 베이고 에이는 듯한 느낌, 그 냉기의 매서움이 뭔지 알려면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늘 가장 싫어하는 계절을 콕 집어 겨울이라고 단정 짓곤 했다.


겨울은 이리도 추웠지만 함박눈이 내린 겨울은 이와는 달랐다. 보통 때보다 더 추워서 눈이 내린 걸 알면서도 완전무장을 하고 밖에 나가면 추위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줄줄 콧물이 나와도 그만이고 두 볼이 찬 공기에 에인다 해도 그만이었다. 눈덩이를 꼭꼭 말아 눈 포탄을 잔뜩 만들어, 뒤로 돌아있는 상대의 등 한복판을 방울 달린 털모자 쓴 뒤통수를 때려 맞히면 아무리 추워도 생기가 돌았다. 우리는 눈썰매를 타보지는 못 했지만 눈싸움을 하든 눈사람을 만들든 그냥 흰 눈이 함빡 내리면 마냥 행복했다. 함박눈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메신저였다.

그런데 시골에서만큼은 희한하게도 하얀 눈밭이 더 큰 따뜻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 어린 시절에 그 이유는 몰랐지만 광활한 벌판에 끝없이 펼쳐진 눈밭 뷰가 어린 나에게도 진귀한 풍광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 눈밭을 따라가다 보면 멀리 한 채씩 놓여 있는 집들이 보이고 눈밭에 파묻혀서 거의 보일락 말락 한 그 집, 식구들은 안에서 뭐 하고 있을까, 하늘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라가는 걸 보면 다 같이 따끈한 아랫목에 모여 앉아서 군고구마 한입 베어 먹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동차나 사람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고 하얗고 뽀얀 눈이 사방천지에 50cm 깊이로 쌓여 있으니 내가 먼저 발자국을 내리라고 옥신각신 다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따스한 햇볕 아래 반짝거리는 눈밭길을 한가로이 걸어보고 눈덩이를 굴려 덩치 큰 눈사람을 만들어보면서 더 이상 눈이 녹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눈을 바라보고 눈을 만져보면서 쨍하고 하얀 그 순수함에 넋을 잃고 마음까지도 깨끗해지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으리라. 새하얀 눈이 녹아 없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 봐, 그런 유유자적한 시간이 끝이 날까 봐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을 것이다. 고요함으로 가득한 흰 세상이 마냥 좋아서.


지금도 여전히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노라면 아이들도 어른들도 마음이 설레는 건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혼자만 아는 것이 아까워 친구들에게 희소식을 전하고 아이들은 눈싸움이라도 하려고 삼삼오오 모이고 이제 나이 먹어 눈길에 넘어질까 스스로가 염려되는 어른들은 물끄러미 창밖으로 아이들 노는 모습에 흐뭇해하거나 따뜻한 차나 한 잔 하면서 몸을 녹이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냥 마음이 자연스레 따뜻해지며 눈이 언제 그칠까를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처럼 춥지 않고 예전만큼 눈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지 뭔가. 예전의 그 깨끗하고 순수했던 동심을.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요 밑으로 언 손 녹여주던 식구들 마음을. 옆집 앞집 내 집처럼 드나들며 군고구마 붕어빵 나눠먹던 옛정을.


작은아들과 펄펄 내리는 눈길을 산책했다. 춥지만 따뜻했다. 깜깜한 저녁인데도 아이들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놀고 있었다. 작은아들도 친구들과 합세하여 한참을 놀다 큰 눈사람을 만들어 인증샷을 올렸다. 푹푹 패이는 눈밭에서 뒹굴었던 추억은 없지만 오늘의 함박눈이 전해주는 따스한 온기가 두뇌 속 해마에 저장되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행복과 환희를 선물해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 본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듯이 전해지는 그 따스함으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보고 또 보고 평생을 보아도 이 시는 마음이 아프다. 나에게 이 시가 묻고 나는 이 시를 가슴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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