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정말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은 인생 목표가 있다. 바로 영어 회화 정복하기!!
하. 나는 왜 하지도 못할 영어를 가지고 자꾸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한국어만 구사해도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굳이 영어를 놓지 못해 안달인 걸까?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붙잡고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학원이나 화상 영어를 다시 시도해 볼 생각도 없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영어로 술술 말하고 싶다는 허황된 생각을 품고 있다. 요즘엔 콘텐츠도 워낙 풍부하여 넷플릭스만 틀어도 미드가 수십(수백?) 개가 넘고 영화는 수만 편이 넘고 유튜브 영상도 쌔고 쌨는데 나는 오리 궁둥이만 내밀고 뒤뚱뒤뚱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니 자탄의 소리만 높아진다.
너 이름이 뭐니? (양희은 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너왜 그모냥이니?
난 실은 영어교육과 내지는 영어영문과에 가고 싶었다.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다. 혀를 휘감는 r, f 발음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고 억양과 강세를 주는 것도 너무 재밌었다.
특히 우리 중1 때 영어 선생님은 좀 독특하셨는데 가령 “action”을 가르칠 때 아주 큰 목소리로 “악!!숀!!”“악센트를 앞에!!” “악숀!!” “악숀!!” 하고 외치셨고 우리는 엄마 오리를 쭐레쭐레 따라가는 아기 오리처럼 “악숀!! 악숀!!” 하고 경쾌하게 따라 외쳤던 것이다. 선생님의 얼굴은 고양이 상이었는데 눈은 누가 이마에서 잡아당기는 듯이 살짝 위로 제쳐 올라가 있었고 콧대도 평범한 동양인보다는 높은 편인데다 대략 큰 입술에도 늘 빨간 루즈가 덧입혀져 있어서 누구에게나 강한 인상을 풍길만 했다. 헤어스타일도 뽀글뽀글 빠마 머리가 사자처럼 풍성했다. 그러나 늘 수업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찍소리도 못하는 쥐마냥 늘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열심히 따라하기만 했다. 누구도 크게 혼난 적은 없지만 수업 분위는 누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냉랭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선생님 수업이 기다려지고 너무 좋았는데 일단 영어에 흥미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단어를 외우다가 발음 기호의 원리를 터득했고 그 비법을 친구들에게 전수했으며 그 원리로 외우다 보니 단어도 곧잘 외워졌다. 우리말과 달라서 얼마나 신선하고 재밌는지 아마 그 선생님의 강력한 발음 지도 방식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냐. 나는 초6학년 때부터 고3까지 7년 간 학급일지를 담당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교무실에 가서 학급일지에 도장을 받고 제출하는 일을 했는데 교무실에서 마주친 영어 선생님은 내가 알던 선생님이 아니었다. 교실에서는 그렇게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하고 개인적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 교무실에서는 완전 딴판이었던 것이다. 와~ 사람이, 아니 선생님이 그렇게 양면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를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송곳 같던 말투와 째지는 목소리 대신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와 목소리로 선생님들과 대화하다가 우리 담임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자, 옆에서 “혜정이? 잘하지~!!” 하면서 덩달아 칭찬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한테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던 건 내 착각이었다. 그때는 수업 전에 출석부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얼굴을 확인하던 시절이었으니, 영어 선생님한테도 많은 아이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50명이 넘는 아이들 가운데 반장도 아니었던 나를 기억해 주신 건 어쩌면 더 영어를 좋아하게 만든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국어도 좋아했기에 대학에 갈 때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커트라인이 낮았던) 국문과에 지원을 했고 영어 공부를 짬짬이 하긴 했지만 거의 토익 준비뿐이었다. 회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고등 때는 뭐 다들 회화 중심으로 공부하지를 않았기에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 아니면 영어는 대부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학 친구가 필리핀 연수 6개월 만에 영어를 엄청 유창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몇 명을 모아 영어 회화 스터디를 만들었고 친구의 권유로 나도 합류하긴 했지만 영어를 슐라슐라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기억이 날 영어 능력 결핍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때 어학원에도 몇 개월 다녔지만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아이를 낳고서도 시원스쿨에 가입해서 다시 기초부터 회화 공부를 시도했고 화상 영어도 몇 개월 하고 성인 회화 학원도 다녔다. 그런데 왜 그런지 할 때마다 1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외국인 앞에서든 한국 사람 앞에서든 입이 잘 안 떨어지고 머리는 텅 빈 공간이 되어 버렸다. 자신감은 오를 기미가 안 보였고 그때마다 포기, 포기, 회화 포기자가 되어 버렸다.
난 짧은 영어밖에 못하는데 누군가 자기 생각을 영어로 휘황찬란하게 말하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한마디로 개부럽다.
그래서 지난 12월 말에 괌에 갔을 때 나는 용을 쓰고 영어로 외워서 말하는 데 전심을 다했다. 그냥 술술 나오면 좋으련만 파파고가 없으면 안 됐다. 파파고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의 의사소통은 누가 대신 했을 것이냐. 해외여행을 대비해 작년 봄쯤에 영어 회화 미니책도 샀고 영어 필사도 했었다. 유튜브로 영어 회화 단숨에 하는 비법도 보고 관심은 널려 있었다. 하지만 간간이 한 거라 제대로 끝까지 한 것은 없었고 갑자기 잡힌 여행 일정으로 간단한 회화조차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공항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공항 영어만 준비했다. 실제로 입출국 심사 때는 거의 “yes!!”만 했던 것 같지만.
괌에서 우리는 pic호텔(리조트)에서 머물렀는데 그곳은 한국 사람 천지였다. 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모두 투어 담당자도 한국 사람이었고 호텔에 머무는 거의 80% 이상의 여행객들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난 영어권에서 영어를 듣고 새로운 문화를 좀 즐기고 싶었는데 웬걸 옆에도 앞에도 뒤에도 다 한국 사람이니 이렇게 거금 600만 원을 들여서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난 속으로 실망이 너무 컸다. 여행의 흥을 깰까 봐 말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파라다이스 도고였다면 훨씬 만족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프런트에서 체크인하고 체크아웃할 때나, 그렇게 재밌다는 서커스를 예약할 때나, 골드 카드를 잃어버려서 프런트에 문의할 때나, 둘째 날 어메니티가 부족해서 요청할 때나, 돈코츠 라멘 식당과 롱혼(LONGHORN) steakhouse에 가서 주문하고 요청할 때나, ABC 마트에서 뭐 살 때영어를 사용해 봐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물론 잘 알아듣지 못해서 대충 넘어가거나 다시 말해 달라고 하거나 버벅거리며 상대방의 말을 되새김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외국인과 대화를 해봤다는 것은 승산이 있었다. 쫀득이같이 쫀득쫀득한 느낌이었다.
게다 남편이나 아들들이 영어를 나보다 더 못하고 못 알아듣는데도 그게 한탄스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우월감마저 들었다. 내가 우리 가족 중 영어 담당자였다는 사실이!!! 하하하. 우물 안 개구리였는데도 그렇게 작은 벽돌을 하나 건너뛴 것이 아이마냥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다.
그래서 3박 4일 중 마지막 날 오전에는 남편과 아들들이 아쉬워하며 모두 수영장으로 튀어갔을 때 난 혼자서 택시를 타고 햄버거를 사러 나갔다. 대단한 모험이었다.(V)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