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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아리다 Mar 29. 20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그대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p147






'초인'과 '영원 회귀'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니체. 원하고, 도전하고, 극복하고, 긍정하는 초인의 삶. 지금의 삶이 반복되어도 좋다는 확신이 있는 삶.  

Amor Fati(아모르 파티) '운명애', 혹은 '운명에 대한 사랑'

� 낙타의 의무감, 사자의 용기, 아이의 순진무구



�독서See너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서머싯 몸, 밀란쿤데라

▶ 올라퍼 엘리아슨 <우주 먼지 입자>,페이 화이트 <매달려 있는 조각>

▶  Top of the World_Shawn Mendes, Lemon_요네즈 켄시





모든 이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말대로 그런 책이다. 모든 이를 위해 썼으나,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그 누구의 것도 아닐 수 있는 책.


니체도 이 책이 그가 살던 당대에는 이해받기 어려울 것임을 알고 있었고, 100년이 지나야 겨우 읽힐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예상대로 많은 철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이 그의 사상을 탐구해 왔고, 심취했으며,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밀란 쿤테라, 서머싯 몸 등의 작가는 니체의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춤은 조르바의 언어였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가 그토록 강조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영원 회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더불어,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를 통해 6펜스 대신 달을 선택한 고갱의 삶을 투영했다. 의무감같은 낙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사자의 정신으로 자신이 '원하는' 예술가가 된 가벼운 삶이다.



페이 화이트 <매달려 있는 조각>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p15



'초인'과 '영원 회귀'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니체.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 '초인'이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을 가리킨다. '슈퍼맨'이라는 의미가 아님을 유의할 것. 어원으로 보나 문맥으로 보나 (다리를) '건너간다'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Top Of the World_Shawn Mendes 

https://youtu.be/oSjigWp6YyE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은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p19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초인은 분명 보편적 인간상과는 다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편 중  정신의 세가지 변화 즉,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건너가는 단계로 설명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득 지고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p35-38



Lemon_요네즈 켄시 




원하고, 도전하고, 극복하고, 긍정하는 초인의 삶. 지금의 삶이 반복되어도 좋다는 확신이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삶이 아닌, '원한다'는 능동적인 삶으로의 전환.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세계를 되찾을 수 있어야 함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는 니체의 철학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찾기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제대로 삶을 살았다는 조르바를 통해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라틴어의 'Amor Fati'.



Amor Fati(아모르 파티)'운명애', 혹은 '운명에 대한 사랑'을 일컫는다.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 체념이 아니라(이것은 낙타의 마인드) 내가 원한 것이고 (사자의 마인드) 그 어떤 상황도 긍정(아이의 마인드)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초인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다.



올라퍼 엘리아슨, <우주 먼지 입자> 2014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상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망상 속에도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들어 있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면 내게도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쾌하고 단순하고 우아하고 활동적인 작은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신을 믿게 된다면 그 신은 다만 춤출 줄 아는 신이리라. (...)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는 계속 달린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나에게는 누군가가 밀고 나서야 움직이게 되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 나는 가벼우며, 이제 나는 날아다닌다. 이제 나는 자신을 내려다 보며, 이제 어떤 신이 나를 통해 춤을 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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