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을 구하는 자리는 맞는데 내가 후진 핸들은 아닐는지

재재의 명언과 나의 자아성찰(feat. 채찍질)

by seri


"핸들을 구하는 자리였는데 나는 바퀴였구나"

나는 바퀴일까? 혹은 하자 있는 핸들일까?


가고 싶었던 회사에 지원하고, 서류와 면접에서 탈락하고, 가장 많이 들은 위로의 말이었다.

"더 좋은 데 가려고 떨어진 거야"

"너랑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네가 못난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야"

조각난 멘탈 회복에 도움이 되는 고마운 말들이었지만 점차 의심이 생겼다.


위로하는 입장에선 이만큼 좋은 말이 없지만, 듣는 입장에선 사실 현실적으로 도움되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을 듣고 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며 갑자기 나는 뭐든 할 수 있는데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그러면서 이성의 끈을 놓고 방심한다. (쓰고 보니 듣는 사람의 태도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가장 최근엔 친구가 '재재'의 명언(?) 짤을 내게 보내줬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졸업 후 몇 년 간 취업준비를 했다고. 오랜 취준 기간 동안 취업이 되지 않은 것은 결국 '핸들을 구하는 자리였는데 나는 바퀴'였기 때문이라는 거다.


평소 재재가 출연하는 콘텐츠를 즐겨보고, 개인적으로 좋은 감정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말이 더욱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저 짤을 저장하기도 했고. 어쨌든 나는 친구의 응원과 재재의 짤을 보고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웅장한 근자감과 안도감을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뜬금없이 콜드플레이의 라이브 공연 노래를 듣다가 이 말에 의심이 생겼다.


연극영화학과 4년(휴학까지 5년)의 기간 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니 나보다 더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나 스스로 상당히 창의력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만큼 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도 많고, 내가 생각도 못한 걸 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내가 수능 등급으로 따지자면 1등급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과 비교해보니 잘 쳐봐야 턱걸이 3등급 아니면 4~5등급이었던 거다. 솔직히 나 잘난 맛(실제로 잘나진 않았는데 자만심이 컸다)에 살다가 갑자기 나보다 더 잘난 애들을 보니 질투심이 생겼고, 나를 비하하기에 이렀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핸들이지만 출시되기엔 좀 모자라서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핸들은 아닐까? 바퀴를 구하는 자리가 맞고, 나도 바퀴가 맞는데 내 바퀴는 내구성이 약해서 A급 바퀴회사에서 들여가지 않고 D급 바퀴회사가 겨우 닦아 쓰는 그런 상황은 아닐까?

더 좋은 데 가려고 떨어진 게 아니라, 내가 지원한 곳이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건 아닐까? 나랑 인연이 아니었거나 서로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주제를 모르는 건 아니었을까?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내 위치 내 능력을 아는 것.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했다가 알게 되는 것보다 과대평가했다가 뒤통수 맞는 게 더 충격이다. 업그레이드는 기분이라도 좋지만, 다운그레이드는 시간 날리고, 기분도 나쁘니까.


물론 나 자신의 위치를 지레짐작해 미리 포기하자는 말이 전혀 아니다. 내 주제를 알고, 만약 내가 그보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능력을 키울 노력을 하거나 아님 내 주제에 맞는 회사를 택하자는 거다.

나보다 더 잘나서 척추 끝부터 머리 끝까지 소름 돋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능력자들을 보며 나를 비하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있지 말고, 그 사람 발톱 때만큼이라도 뭘 만들어보자는 거다.

핸들 뽑는 자린데 나는 바퀴였어! 하면서 행복 회로 열심히 돌리는 대신, 내가 진짜 바퀴인지, 핸들인지, 그 회사는 어느 정도 성능의 바퀴와 핸들을 바라는지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 글은 오늘 하루를 방심하며 산 나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매질이다. 언젠가 나와 맞는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야, 이 회사가 내 운명이라면 대충 해도 뽑힐 거야, 라는 근거 없는 긍정 회로를 멈추는 제동장치다.


대학교 n학년 언젠가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 스스로 매질과 제동장치를 수없이 많이 해오고 걸어왔지만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다. 언제쯤 정신 차릴는지.

물론 정신 못 차리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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