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독후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세상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항상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실체를 멀리서나마 접하게 되었을 때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미리 대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한들 진짜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숨결이 바람 될 때> 같은,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의 투병기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한다. 그것이 진심인지, 실제로 행동에 옮길 만큼 짙은 생각인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언제 죽을지는 모른다는 것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머리로는 말이다. 그래서 유서도 써 두었다. 이미 몇 년 전의 일이다. 당시 유서에는 "내가 죽은 뒤에는 나는 이 세계를 인지할 수 없으므로 장례든 유품 처리든 내 가족의 마음, 가족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어머니의 마음에 따라 진행하면 된다." 이런 내용을 적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내가 썼듯, 죽은 뒤에는 이미 의식불명인데 그 뒤의 일이 뭐가 중요할까?
하지만 이미 죽은 뒤가 아니라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누구나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매 시각 자신의 삶이 몇 년 몇 시간이 남았는지 알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마 지금처럼 삶을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얼마의 삶이 남아있는지 알고 있는가? 만약 3년이라면 당신은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고민이 될 것이다.
폴은 미국의 신경외과의로, 처음에는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이후 다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처음에 영문학을 전공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전하는 수단은 오직 언어뿐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그 부분의 서술이 대단히 시적이다.
나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정확하게는 영문학 전공 이후 영문학 석사 과정에 지원할 무렵의 생각이지만 그가 애초 영문학을 시작할 때 이미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다시 힘들게 의학을 전공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문학,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이론적 한계를 느꼈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오직 의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사가 된 후에도 내과나 영상의학과 등에 지원한 게 아니라 신경외과의 수련의가 되었다. 그가 가장 궁금해한 것은 뇌와 삶과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극적 이게도 오랜 시간의 수련 끝에 교수가 되기 직전, 그는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누구보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이 부와 명예와 찬란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좌절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어두컴컴한 나락과 같은 좌절,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갈림길은 여기서 시작된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에 따라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우울해하다 수용할 것인가? 만약 당신에게 단 한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5단계를 거치기도 전에 이미 당신은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한부 선고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의사는 신이 아니며, 병의 진행 속도 역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민한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쉬울 텐데요.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
대체로 병에 걸려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험난한 투병 생활을 하다 마침내 죽음에 이른 이들의 책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저자들에게는 단 한 번의 죽음이자 자기에게 닥쳐온 가장 큰 비극일 테고 그 과정도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지만 읽는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시한부 선고 - 이렇게 죽을 순 없어 - 무언가를 열심히 해 낸다 - 죽음.
이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다 비슷한 책 같은데도 이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아니 그보다 이런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그렇게 신중하게 고민하고 뜻을 세워 의연히 싸워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폴 칼라니티는 환자이자 의사로서 자신의 죽음과 함께 닥쳐온 절망을 훌륭하게 이겨냈다. 그는 언제나 냉정하게 자신의 현실을 보았고, 그 와중에도 언제나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했으며, 끝까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