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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Nov 01. 2018

1793년,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를 파고들다.

빅토르 위고, <93년> 독후감

 많은 유럽국가 중에서도 이미지가 좋은 국가 중 하나를 꼽으라면 프랑스를 꼽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프랑스 하면 파리와 파리 바게뜨, 그리고 삼색이 나란히 서 있는 깃발도 생각나겠지만 이미지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프랑스 혁명'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왕정을 타파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권리를 되찾은 국민들! 언제나 고생 끝에 자기의 권리를 되찾는 스토리는 영화와 소설을 불문하고 인기가 많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루이나 로베스 피에르, 단두대로 알려진 기요띤느의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겠지만 그 과정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잘 모를 것이다. 인류, 유럽이나 프랑스가 아닌 인류의 민주주의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여겨지는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보고 싶다면 소설 <93년>이 제격이다.


 이야기는 랑뜨낙 후작과 함께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대결 세력을 크게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눌 수 있는데(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왕당파가 기존 군주제를 옹호하는 집단이고, 공화파는 시민 권력을 주장하는 집단이다), 랑뜨낙 후작은 대표적인 왕당파의 인물이다. 이 때도 공화파를 공격하러 가던 왕당파의 군대는 병사의 실수로 인해 내부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러나 실수를 한 당사자가 몸을 던져 그 상황을 극복해 내는데, 랑뜨낙 후작은 이 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한 뒤 곧바로 사형을 언도한다. 군인으로서 책임감을 발휘했기에 훈장을 받아 마땅하나 동시에 자신의 실수로 군대가 위험에 처했기에 사형감이라는 것이다. 원칙주의자로서 랑뜨낙 후작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곧 랑뜨낙 후작은 위기에 처한 배를 떠나 단 한 명의 병사와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 병사는 후작이 처형한 병사의 형제다. 그 병사의 입장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형제를 죽인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처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도 후작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냉정하게 원칙을 읊는다. 아, 이 어찌 철혈의 보수주의자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말의 인정도 없는 그의 원칙 앞에 감탄했다.

 원칙주의자 랑뜨낙 후작의 모험은 이어진다. 몇 번이고 위기에 처해가며. 한편, 공화파에서는 대표격 인물로 고뱅과 씨무르댕이 등장한다. 이들은 공화파를 대표하기에 왕당파의 랑뜨낙과는 대조가 되면서도 두 사람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고뱅과 씨무르댕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1793년, 프랑스 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왕당파와 공화파는 격렬한 전쟁을 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이 승리의 역사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공화파에 가담하여 순식간에 전쟁을 끝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소설 속의 묘사를 보면 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친 하층계급(농민이나 소작민)이 있었다. 그러나 숫적으로 그리고 기세에서 열세인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왕당파는 영국군을 끌어들여 혁명을 잠재우고자 했고 이 부분이 마치 일본을 몰아내고자 다른 나라에 기댔던 조선 왕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유명한 작품 <마라의 죽음>. 마라는 공화파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으나 암살당했다.

 어쨌건, 격렬한 전쟁의 대의는 민중의 주권 회복이었으되 그것은 분명히 전쟁이었다. 같은 나라 사람들, 형제 자매들끼리 총칼을 겨누고 죽여댔으며 그와중에 나라가 황폐화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라는 것은 국토가 아니라 '국민'이다. 어떠한 좋은 명분을 가졌든 간에 전쟁은 인간의 삶을 황폐화 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그리고 대의라는 이름 앞에 그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소시민들이 희생되어 갔음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이는 총살을 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엄마와 헤어진 세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데 사실상 <93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왕당파는 엄격한 원칙주의자 랑뜨낙 후작의 지휘 아래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전쟁터에서 발견한 엄마 없는 세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러나 후작과 그 병사들은 한 성에 갇혀 농성전을 벌이게 되는데, 후작의 부하가 공화파가 정녕 성을 점령하려 들 경우 폭약에 불을 붙여 세 아이와 함께 폭사하겠다는 협박을 한다. 공화파는 이에 대비해 긴 사다리를 공수해 오지만 그 과정에 차질이 생기고, 결국 공화파가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폭약에 불이 붙어 세 아이의 생명은 일생일대의 위험에 처하고 만다.

 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대로 폭사해 왕당파의 잔혹함과 공화파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비극의 징표가 되었을까? 혹은 왕당파에서 도화선을 끊어내 목숨을 건졌을까? 그도 아니면 공화파에서 사다리가 아닌 초능력을 발휘해 기적적으로 살려냈을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 아이 사건으로 인해 왕당파, 공화파, 랑뜨낙, 고뱅의 선악이 뒤얽히고 소설 <93년>은 인간의 깊은 면을 비춰주는 명작이 된다는 것이다


 짧게 한 가지 감상을 더하자면,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대의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전쟁을 시작하지만 또 그 대의라는 걸 만들어 내는 지도자 격의 인물들은 한편으로 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사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게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을 이들은 고차원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세계로 끌어 올리려 애쓰고, 이것은 무의미해 보이지만 또 세상이 이들에 의해 큰 방향을 잡는 것은 사실이다. 부질없어 보여도 결국 그들이 세상을 쥐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소시민들은 권력자들이 벌이는 언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한 생을 살아낸다. 남녀혐오를 비롯해 요즘 벌어지는 수많은 언쟁도 결국 그 범주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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