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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Aug 28. 2019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 왜 그러세요?

최광현, <가족의 두 얼굴> 독후감

 최근에 아버지와 다투었다. 발단은 전화였다. 여자친구와 저녁을 먹고 있던 휴일, 아버지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 있다 전화를 드리면 되겠거니 하고 받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 때부터 90% 정도 예상했다. 

 '지금 아버지와 술을 드시고 계시구나!'

 아니나 다를까, 십 분 뒤 아버지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다. 나는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경험상 술을 마시다 전화하는 아버지는 잔소리가 많으셨다. 술 취하셨을 때가 아닌, 내일 낮에 전화를 드리면 되리라 생각했다. 전화는 한 십 분 뒤에 다시 한 번 걸려왔고 곧 끊겼다.

 다음 날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또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문자를 남겨두었다.

 「오늘 일이 좀 바쁘니 이따 전화드릴게요.」

 이 날은 야진이 있어 오후 9시에 퇴근을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한의원에서 홀로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니까 네 번째 전화였던 셈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니는 임마, 전화 한 번 받기가 그렇게 힘드나! 앞으로도 전화 안 할 거면 끊어라!"

 전화는 끊겼다.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나는 하던 정리를 이어갔다. 그 동안 간신히 유지해오던 인내심의 끈이, 이 날 뚝 끊어져 버렸다.

 우리 아버지는 대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

가족을 마음대로 부려먹으려 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조종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꾸짖으며,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조차도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왜 자신도 모르게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상처를 주는가? 자신도 어린 시절에 그렇게 당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 <가족의 두 얼굴> 중에서

 우리 아버지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하신 편이다. 대학교 다닐 때에는 나더러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전화를 하라고 명령을 하기도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기를 두 달 정도 이어갔을 때다. 아버지는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전화는 성의가 없어! 앞으로 하지마!"

 사실 원래도 부모님께 연락을 잘 드리지 않는 편이지만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아버지께 전화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해도 뭐라하고 안 해도 뭐라하니, 그냥 원래 내 성격대로 안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에 당하는 자식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베이트슨은 이중구속을 설명하기 위해 동양의 선불교를 예로 든다. 선사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지팡이를 제자의 머리 위에다 올리고 말한다. “네 머리 위에 지팡이가 있느냐. 지팡이가 실제로 있다고 말하면 때릴 것이고, 없다고 해도 때릴 것이다.” 여기서 제자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이중구속의 상황이다. 문제 가족은 언제나 자녀들을 이런 상황에 빠뜨린다.
- <가족의 두 얼굴> 중에서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란 단어를 무척이나 신성시 된다. 자신을 모독하는 것은 참아도 가족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단 말도 있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다. 비록 왜곡 되었다고는 하지만 장유유서를 대단히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원초적인 관점에서 돌이켜보자.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자식은 부모에 의해 태어나며, 태어나기까지 이들에게는 어떠한 의사 결정권이 없다. 오직 부모의 결심으로 인해서만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낳아주신 은혜'라고 표현하지만 정말로 낳아주는 것이 은혜인가?

 부처님은 인생이 고해(고통의 바다)라 하셨고, 내가 봐도 세상살이는 녹록치 않다. 삼시세끼 챙겨 먹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굶주려야 하며, 행여 병에 걸리면 아파야 하고, 재수없으면 차에 치여 죽어야 한다. 물론 중간중간 즐거움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로 태어난 것을 복이라고 일컫는 게 바른가에 대해 나는 늘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나아가 나는 도리어 부모에게 돌봄의 의무를 다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식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순전히 부와 모, 두 사람이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그 탄생시킨 생명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는 대담하게 내 자신이 제대로 된 가족에게서 자라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다투셨고, 나는 부모의 불화로 인해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어떠한 돌파구도 없이 자랐으며, 그로 인해 정상적인 가족을 형성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까지 안게 되었다. 늘 나를 나무랄 줄만 알고 사랑은 표현할 줄 모르는 아버지가 대체 내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에 상처를 받았을 때 누구에게도 갈 수 없었다는 것은 한번도 사람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은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이들은 이미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감만이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게 된다.
- <가족의 두 얼굴> 중에서

 이 책을 읽고서 다시 한 번 확고히 결심한 바를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와 잘 지내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두 번 다시 전화하지 않는다 하여도 내가 굳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지로 하기 싫은 전화를 걸지는 않겠다. 나는 아버지의 의지 때문에 태어나 30년을 살며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늘상 부모의 불화를 보며 자랐음에도 거기에 대해 부모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양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 가족에게서 정서적인 연을 놓을 것이다. 기능적으로 하나뿐인 아들로 남아는 있되 내가 바라보는 것은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내 미래지 가족의 미래와 평화가 아니다. 나는 나 하나로 구성을 하든 나중에 아내와 구성을 하든 나 자신의 가족을 꾸릴 것이며 과거에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내 가족에게는 전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마음에 아무리 대리 역할을 하려 해도 자녀는 자녀일 뿐 부모가 될 수 없다. 가족관계에서 스스로 맡아야 할 그 이상의 역할을 내려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 <가족의 두 얼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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