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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07. 2019

돈 수천 날려도 행복할 수 있다

 최근 어느 야간 진료를 하던 날의 일이다. 저녁 8시가 넘어 환자가 뜸해지자 무료해졌다. 벌써 책을 한 권 다 읽은 상태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도 다 봐서 할 일이 없었다. 결국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나는 연락이 뜸했던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전화를 하다 마지막에 전화를 건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는 후배였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다리 건너 듣기로, 이 후배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몇 년간 모은 5천만원을 싹 빼앗겼다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황망해지는 내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5천만원을, 사기를 당해? 도저히 맨정신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배는 금방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참 강인한 녀석이구나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으로는 얼마나 힘들까 쯔쯔 하며 동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를 걸고 안녕 잘 지내니 묻자마자 돌아온 대답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네, 형. 전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형은 잘 지내세요?

 그 목소리 어디에도 주저함과 속임이 없었고 오직 발랄함과 활기만이 가득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전화를 걸었다가 놀라고 말았다. 이게 겨우 일 년 전에 5천만원을 사기 당한 사람의 목소리가 맞단 말인가? 후배는 요즘도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와인동호회에 나온 참이라 가봐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아니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계속 후배 생각이 났다. 그 녀석은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 있을까? 어이없는 사기전화로 5천만원을 날리면 누구나 화병이 나서 드러누울 거라 생각할 텐데 세상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정말로 역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의 다음 무대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성격이 무던하고 긍정적인(가끔은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편이긴 했지만 사기범죄 집단도 그 아이를 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수 년 전 잘못된 투자로 큰 돈을 잃었고, 나는 여태 그 돈 생각에 메여 우울한 날을 보내왔다. 그런데 비슷한 일을 당해놓고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나니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온 내가 참 못나고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투자하다 보면, 아니 살아가다 보면 돈 날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마침표 찍어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그 다시 시작하는 지점을 즐거움으로만 칠한다 해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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