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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송 Dec 31. 2019

남의 시선에 자꾸 신경쓰면 삶이 짐이 된다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독후감

 삶을 짐으로 여기는 사람이 참 많은가 봅니다. 이런 제목의 책까지 등장했을 정도니까요. 오늘은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리뷰합니다.

 표지에 마르틴 하이데거가 있죠. 이 책은 박찬국 교수가 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하이데거는 고등학교 도덕 시간(윤리라고 하나요?)에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사실 뭐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박찬국 교수가 해설을 해 주는 거죠.

 책 내용 조금 보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소명을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으로서 거주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김수영이나 윤동주 같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만약 그것이 인간의 소명이라면 시적 감성을 가지지 못한 저로서는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도구로서, 객체로서 사는 것'의 반대말입니다.

 인간은 모든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원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됨으로써 인간과 물질의 차이는 소멸되고 맙니다.

 전 세계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한국 사람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한국 사람은 왜 그렇게 자살을 많이 할까요? 여성 인권도 높고, 죄수의 인권도 존중하며, 국가 소득이 높아 거지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최신 휴대폰과 컴퓨터를 사용하고, 맛집도 길에 널렸죠.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라고 봅니다.

 자신이 대체 불가한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만약 제게 "당신은 대체 불가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온다면, 저는 상당히 자신 없는 태도로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로서의 유송은 대체 불가하나, 한의사로서의 유송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러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이는 거기서 나타나죠. 노동자는 언제나 대체 가능하며, 의사나 판사나 고급인력으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대체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직업은 직업이고, 우리 자신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문제는 지금 사회가 이미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쇠락하고 새로운 종교가 흥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이다.' 맞습니다. 이제 돈은 우리가 쓰는 재화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돈이 많으면 사람 좀 쥐어패고 합의금 쥐어주면 그만입니다. 돈이 바로 법이고, 신인 셈입니다. 확실한 건 단순노동자보다야 절대 우위에 있다는 것이죠. 그런 사회에서 대체 불가한 노동자(이런 노동자는 많지 않으니 자본가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가 되어야 자존감이 늘 버텨주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니 모두 자존감이 바닥을 칩니다. 이런 생각 누구나 하죠.

나 같은 놈 하나 죽어봐야 이 사회에선 누구도 모를걸.

 이게 바로 한국 사람이 자살을 많이 하는 이유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니 목숨을 끊는 게 쉬워집니다.

 하지만 이것과 삶이 짐이 된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책 내용 다시 조금 보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이 잡담과 호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타인에 대한 비교의식에 일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학업성적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 같은 세간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규정합니다.
 하이데거는 비교의식이 지배하는 삶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타인들에게 예속된 채 그들의 자의와 변덕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비교의식은 한국 사회에서만 만연한 것은 아닙니다. SNS 중독이 심해질수록 스스로 불행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 정신과 환자들의 공통점입니다. 그야말로 옛말이 딱 들어맞죠. 비교가 불행을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더 무섭고 중요한 것은 비교가 불행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서울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 의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의 고등학생 김 군이 있다고 칩시다. 이 학생은 과연 어디를 가게 될까요? 두말할 것 없이 의대를 가게 되겠죠? 그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당연히 미래 수입에 대한 기대치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끝도 없이 참견하겠죠. 무슨 고민할 일도 아닌 것을 고민하고 있냐고. 그러나 이 질문과 답변 속에 김 군의 의지는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김 군이 수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누구에게서도 조언을 듣지 않은 상태라면 문예창작과를 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죠.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과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99대 1 수준으로 갈리진 않을 테니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타인의 시선이 남의 인생에 관여를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돌아봅시다. 나의 직업은 내가 원해서 가진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가지게 된 것인가? 나의 취미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 사회생활에 유용해서 가진 것인가? 내가 읽은 책은 정말로 궁금하고 재밌어 보여서 읽은 것인가, 남들이 읽기에 따라 읽은 것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다 보면 내 삶이 왜 그렇게 재미없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나아질지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독후감 한 편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늘 씁니다. 이 글을 보신 분들이 2019년 마무리 잘하시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2020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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